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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15. 2023

요코하마 브루쓰


요코하마엔 비가 내렸다. 우산 없이 요코하마 바닷길과 미나토 미라이를 걸었다. 한 손에 편의점에서 산 무당 레몬사와를 들었다. 걸음의 목적은 목적지의 도착이 아닌, 걸음 자체다. 한 걸음걸음 음미했다. 요코하마의 12월의 찬 바다 공기, 도보를 따라다니는 일루미네이션, 퇴근길의 직장인, 요코하마 항구 놀이공원의 화려한 움직임, 알고리즘이 선곡한 재즈 넘버가 섞였다. 알콜 5도짜리 레몬 사와 한 잔에 취했다. 화룡점정으로 취한 자신에 취했다.



1분 거리를 10분 동안 걸었다. 한 걸음 내딛고, 화두를 던진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걸음 내딛고 답한다. 은퇴했고, 돈 있고 시간이 있으니까. 한 걸음 내딛고 혼낸다. 분위기 잡는 거 안 보여? 눈치 챙기자. 한 걸음 내딛고 오답노트 작성한다. 나의 영혼이 인도했으니까. 한 걸음 내딛고 박수 친다. 역시 자네야. 모든 것은 운의 결과다. 운을 영혼의 인도라고 고쳐 쓰다니 자신에 취한 사람답군. 영혼의 인도를 받아 요코하마 항구로 이어지는 다리, 요코하마의 금문교이자 하버브리지를 건넌다. 다리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춘다. 레몬 사와 들고 다리 밑을 내려다본다. 빠르게 지나치는 차들이 인생에서 만난 여러 인연과 사건처럼 느껴진다.  



자신에 취해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아버지와 아들이 나를 지나쳤다. 마침 내 영혼이 나를 요코하마 코스모월드로 이끌었다. 코스모월드라. 영어엔 우주를 말하는 세 단어가 있다. 유니버스, 스페이스 그리고 코스모스. 스페이스는 공간의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고, 유니버스는 과학적 우주로써, 코스모스는 어떤 질서로써 쓰인다. 철학적 개념으로 다뤄진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우주적 관점의 질서가 작용한 결과다. 술 한 잔에 세상의 오묘함에 감복한다. 그 오묘함이 아름답다. 아름다운 이 순간에 감탄하며 부자가 있는 매표소로 향했다.



마지막 모금을 마시고 빈 캔을 매표소 앞 재활용 통에 넣었다. 부자가 타려는 놀이기구는 아동용 롤러코스터다. 의자도 작고, 굴곡도 적고, 무엇보다 일주 시간이 짧다. 평소였다면 절대 타지 않았을 놀이기구. 이 순간이 나를 비 맞으며 술 마시게 만들고, 내 눈에 한 부자를 담게 만든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현금을 기계에 넣고 표를 끊었다. 좁디좁은 아동용 롤러코스터에 엉덩이를 구겨 넣었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급하강 구간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사이즈가 큰 그네 수준의 하강에 실컷 소리 질렀다. 앞에 앉은 아이처럼 만세하고 이 세상에서 지금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행복을 두 팔과 얼굴과 가슴으로 마주했다.



사람을 찾아 도심으로 내려왔다. 레몬 사와를 한 잔 더 사고 요코하마 역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그리웠다. 온전히 홀로되는 경험, 내게 몰입한 상태로 몇 시간을 보냈다. 이제 세상으로 나올 때다. 딱히 깨달음을 얻진 않았지만, 짜라투스트라처럼 인간을 위해 세상으로 내려왔다. 30대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는 다정함. 다정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세상에 다정함의 총량을 늘리고 싶다. 숯불구이 집으로 향했다. 줄을 섰다. 뒤에서 기다리던 중국인 여성 이 인조와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온 나는 카운터석으로 먼저 들어갔다. 퇴근시간의 숯불구이집은 인간의 에너지가 밀집된 공간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기운 넘치는 인사를 받으며 들어왔다. 숯불의 열기와 고성이 뒤얽혀 외향인의 에너지를 채워줬다.



취객이 거리로 나왔다. 레몬 사와를 4잔과 함께 숯불 꼬치 세트와 수프, 닭 심장 회, 양배추 찜을 먹은 취객. 대략 한 시간 반이 지났고, 그 사이 나는 만취했다. 그전에 분위기에 취했다면, 레몬 사와 4잔엔 그냥 취했다. 감사합니다! 미닫이문 열고 나가는 등 뒤로 기운 넘치는 인사가 들린다.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우산 모르는 호주 문화에 10년 살았다. 취기는 비를 더 기껍게 만든다. 비를 맞으며 근처에 있는 아메리칸 펍으로 향했다. 와인 한 잔과 새우튀김을 시켰다. "와인은 작은 사이즈와 큰 사이즈가 있습니다. 작은 건 300엔 큰 건 500엔(정확하지 않음)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로선 다른 방도가 없었다. 큰 걸로 주세요. 한 모금 마시고 깨달았다. 더 마시면 토한다. 와인 한 모금만큼 더 취한 사람이 10분 만에 거리에 재등장했다.



요코하마 브루쓰는 엔딩을 향한다. 원래 형태인 스윙류 블루스 댄스가 아니라, 한국식 브루-쓰다. 남녀가 느린 음악을 들으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단순한 음악. 보통 제비와 사모님이 춤바람 났을 때 추는 춤이다. 나와 요코하마의 밤이 두 손을 맞잡고 진자운동을 한다. 놀이기구를 타고, 밤거리를 헤매고, 숯불구이를 먹고, 식음료 낭비하고, 비를 맞는다. 요코하마와 나의 춤바람은 엔딩을 향한다. 휘청휘청 걷는 내가 가장 못 하는 일은 발밑 조심이다. 빗길을 뚫고 숙소로 타박타박 걷는다. 휘청- 남성 댄서가 파트너의 허리를 크게 회전시키듯, 요코하마는 나를 몇 바퀴 돌린다. 바닥에 턱에 있었고, 비에 젖었다. 아뿔싸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를 때는 이미 콘크리트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상태였다.



홀딱 젖은 옷에서 빗물이 뚝뚝 흘렀다. 호텔 카운터 직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향했다. 사우나와 목욕탕이 딸린 호텔이다. 젖은 옷을 벗자 피 난 무릎이 등장했다. 성인이 넘어질 일이 많지 않다. 그 힘든 일을 한 자신이 대견스럽다. 샤워하고 욱신거리는 팔꿈치와 무릎을 이끌고 욕탕에 들어갔다. 무릎이 41도 탕에 들어가자 머리가 쭈뼛 선다. 이것이 혼을 쏙 빼는 춤바람이다.



나의 요코하마 일탈은 막을 내린다. 비와 레몬 사와에 흠뻑 젖었다. 요코하마와 나의 블루스는 희극 속 커플 댄스다. 오가는 스텝에 변주가 숨어 있다. 아동용 롤러코스터의 환호부터 낯선 이와의 알콜냄새 나는 대화까지. 발견의 연속이다. 아스팔트와 한바탕 뒹굴러 생긴 상처를 욕탕 물에 담그니 실소가 새어 나온다. 요코하마는 볼거리 이상을 제공했다. 생각의 변주, 웃음의 무대장치, 과거로의 여행 등. 어쩜 폭우에 대처하는 최고의 방법은 실컷 취한 뒤 세상과 엉성한 춤을 추는 게 아닐까. 이상 요코하마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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