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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Mar 24. 2024

글쓰기와 공생 관계


글과 공생 관계다. 또한 호혜적 관계다. 나와 그 행위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맞아 어울려 살고 있다. 글의 의인화에서 글과의 친밀함이 드러난다. 글은 나로 인해 세상에 나오려 하고, 나는 글을 통해 매일의 유익함을 얻는다. 이 글에서 상생의 구조를 파악한다.



호텔 식당에 조식 먹으러 내려왔다. 랩탑을 챙겼다. 간밤에 충전이 완료됐다. 커피 한잔하며 생각 정리할 동안 방전될 걱정이 없다. 랩탑을 펴지 않으면 좀처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조건반사보다 위에 있는 의식적 사고 활동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유'란 단어가 적절하나, 다소 낯간지러워 이번엔 생각으로 뭉뚱그렸다. 커피를 옆에 두고 블로그 창을 연다. 랩탑을 펴니 수동성에서 벗어난다. 사고 영역이 활성화된다. 생각할 준비가 됐다.



가끔 깜짝 놀란다. 수동성의 정도가 지나치다. 읽고 쓰고 토론하는 취미가 있다. 이 모든 취미는 주관을 길러준다. 많은 시간을 취미에 투하했다. 주관이 생겼다. 글을 쓰며 생각한다. 아! 나는 주관이 분명하구나. 그 과정에서 어디서나 나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실상 그렇지 않다. 이거 어때 저거 어때? 누군가 묻는다. 아 그것도 좋고 이것도 좋네. 잘 모르겠다. 아무거나 골라줘. 혹은 분명한 맹점이 보이는데 약간의 생각을 하지 않아 지나친다. 후회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 한 마디와 함께. 조금만 생각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틀은 유익하다. 능숙하게 사고하기 위해선 틀이 필요하다. 약간의 제약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낸다. 규칙이 있어야 게임이 진행된다. 같은 맥락이다. 글이라는 형식 위에서 사고 진행이 원활히 이뤄진다. 논리 전개가 일정한 형식을 통해 이뤄진다. 핵심 주장에 근거를 달고, 예시를 덧붙인다. 내가 모르던 나의 생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지면에 생각을 남기지 않으면 좀처럼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다. 100의 에너지를 쓰고도 별다른 결과물을 얻지 못한다. 글쓰기는 다르다. 그때그때 생각을 엄격한 규칙에 따라 나열한다. 문제 파악이 쉬워진다. 그러니까 글쓸 환경이 됐을 때 가치판단을 몰아서 하는 편이 에너지 절약 측면에서, 시간 절약 측면에서 유리하다. 글쓰기라는 틀은 생각 정리에 최고의 처방이다.



글쓰기로 인해 생각정리를 미룬다. 문제적 행동(가치판단이 필요한 행동)을 저질렀거나, 마주했을 때 생각을 정리한다. 이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심지어 나의 기호를 몰라 헤맬 때도 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이런 측면을 봤을 때 선호 쪽에 가깝고 저런 측면을 봤을 때 비선호에 가깝네. 종합했을 때 나는 이것을 좋아/싫어한다. 조건반사격 사고-그러니까 배고프네 뭐 먹어야지-의 경우 생각정리가 필요치 않다. 그때의 감정이 정한다. 일상 대부분이 조건반사로 이뤄진다. 뇌의 에너지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기본 자율주행모드(조건반사)로 산다. 그러다 가치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 에너지 사용을 요구한다. 나는 글쓰기에 작업을 미룬다. 나중에 글로 정리하자. 일단은 복잡한 문제는 피하자. 에너지 절약을 위해 귀찮은 일을 한곳에 모아둔다.



극도로 효율을 따지다 보니 생긴 일이다. 투하 자본대비 높은 성과를 원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인물의 사고방식이다. 자본가며 사업가의 마인드다. 아무 도구 없이 생각하니 공회전이 많다. 생각이 진행되지 않고 도돌이표를 찍는다. 문단과 문장이라는 틀이 있다면 차근차근 진행돼서 반복을 피할 수 있다. 생각은 틀이 없어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손해 보고 싶지 않아'라는 마음이 능동성을 뺏는다. 나중에 글 쓸 환경 될 때 몰아서 하자. 가성비 좋게 살자. 그러다 보니 간단한 생각 정리도 급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한다.



글쓰기의 매커니즘은 이렇다. 평소에 발견한 문제에 대해 직관적으로 답을 내린다. 가치판단 문제냐, 기호 문제냐? 가치판단의 경우 옳다 그르다, 기호의 경우 좋다 싫다. 직관이 알려주는 임시 답안을 받는다. 대체로 임시 답안이 맞다. 문단의 머리에서 선언한다. '00은 옳다' 뒤이어 근거를 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근거 중 가장 명확하고 대표적인 답안을 찾는다. 뒤 문장에 붙인다. '왜냐하면 00은 00이기 때문이다' 근거의 사실 여부를 추가하거나 근거의 신빙성을 올릴 문장 하나를 덧붙인다. 그 뒤에 주장과 관련한 예시를 붙인다. '가까운 예로 00이 있다' 마지막으로 주장을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00이 옳다' 이렇게 문단을 이어나가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명제 하나를 문단 단위로 나눠서 정리한다. 사다리 타기와 비슷하다. 발판 하나하나를 보강한다. 밟아서 한 걸음 올라간다. 타고 타고 올라가서 결론에 이른다. 글 전체에서도, 하나하나의 문단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로 진행된다. 주장, 근거, 예시, 주장이다. 하나하나의 근거를 정리하고 왜 주장일 수밖에 없는지 언급한다. 위 글쓰기 매커니즘을 통해 생각이 명쾌해진다.



한국에 왔다. 목요일 멜버른을 떠났고, 어느새 일요일이다. 지난 사흘 글 한 편 쓰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의 노예였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랩탑 속에 그 시간에 숨겨져 있다. 랩탑 충전이 원활하지 않아서, 꼭 해야 하는 일이 밀려 있어서 랩탑을 펴지 못 했다. 흘러가는 대로 지냈다. 파트너가 등장할 때가 됐다. 글쓰기 덕에 며칠 생각 없이 살았다. 조식 시간이 1시간 남았다. 커피도 반 잔 남았다. 글쓰기와 밀린 숙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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