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과식의 나날이다. 이번 한국 방문의 주된 이유는 결혼식 참석이다. 사회자 역할을 맡아 몇 주 전부터 연습에 매진했다. 귀국한 다음날 예식장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신랑은 먼 타국에서 온 친구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3박 4일 호텔 제공은 물론 매 끼니 대구 맛집으로 안내했다. 그야말로 대구 풀코스다. 넙죽넙죽 제공한 음식 받아먹었다. 위장이 빌 틈이 없다. 음식물이 소화되려고 하면 음식이 채워진다. 조금 내려가려 하면 다시 음식이 채워진다. 그야말로 대구는 음식 화수분이다. 적당한 맛이라면 자제할 텐데, 하나하나가 일품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먹을지 모르는 맛이다. 후회가 싫다. 수저가 움직인다.
아침을 먹지 않는다. 호텔 조식이 딸린 호텔에 묵었다. 투숙객이 아닌 사람이 이용하기 위해 이용료 38,000(굳이 0을 더 집어넣는다. 친구의 배려의 극적 표현) 원을 지불해야 한다. 투숙객은 특별 할인가가 적용된다. 8,000 원이 저렴한 30,000 원이다. 선택 사항이었다면 우리의 답은 'No'다. 친구의 배려는 조식에 이른다. 아침 먹지 않는 부부란 것은 알지만 혹시나 먹고 싶을 수 있으니까-란 마음이 60,000 원 조식에 담겼다. 60,000 원이나 썼다. 도저히 안 먹을 수 없다. 8시 즈음 랩탑을 들고 내려온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자리에 앉는다. 랩탑을 펴고 할 일을 정리하고, 커피를 마신다.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 했다. 필요와 무관한 소비를 한다. 커피라도 안 마시면 단가 맞지 않는다. 커피를 홀짝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생각하니 아깝네. 38,000 원이나 지불했는데 커피만 마신다고? 사향고양이 커피야? 그냥 기계식 원 버튼 커피에 38,000 원을 쓴다니. 참을 수 없어. 샐러드 한 접시라도 먹어야지. 시저 샐러드 조금과 훈제 연어 3조각을 들고 왔다. 5초 만에 그릇을 비웠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글을 이어갔다. 그러다 너사와가 내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이런저런 음식을 가져왔다. 견물생심이다. 시선으로 욕망이 생긴다. 봄은 무섭다. 바라보는 것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식감과 맛을 유추하게 된다. 저 친구도 먹는데 나도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러고 보니 옆에 앉은 저 사람도 먹고, 저 사람도 먹고 있잖아. 나만 안 먹으려 했다니 그거 참 우스운 일이군. 식당은 무언가 먹으러 오는 곳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모두가 먹으니 나만 빠질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살이 찌지 않은 음식 위주로 담았다. 결혼식 당일이다. 사회를 본다. 친구를 위해 단정한 모습으로 식장에 등장해야 한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 잘생긴 친구의 잘생긴 친구가 되어 기운을 불어넣고 싶다. 잘생긴 사회자가 되기 위해서 아침을 걸러야 한다. 하지만 무언가 먹게 됐다. 이왕 먹는 거라면 살이 찌지 않고, 활동에 지장을 비교적 덜 주는 채소를 먹겠다. 각종 나물을 담았다. 시금치, 콩나물, 낙지젓, 진미채볶음 등과 한입 정도의 쇠고기 죽을 퍼 왔다.
큰일이다. 낙지젓이 너무 맛있다. 지나치다. 게다가 쇠고기죽과 조합이 더할 나위 없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죽을 한 스푼 떠서 그 위로 매콤하고 쫄깃한 낙지젓을 올린다. 입안에서 두 식감과 맛이 조화를 이룬다. 마치 빙판 위에 선 커플 피겨 선수다. 남녀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며 강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진다.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를 번쩍 들고 회전한다. 여자 선수는 손과 발을 이용해 우아한 곡선을 만든다. 두 선수의 시선이 하나로 이어지고 그 사이 공간을 채운다. 강한 에너지가 터져 나와 브라운관(스마트폰 액정)을 뚫고 시청자를 홀린다. 쇠고기죽을 한가득 퍼서 그 위로 낙지젓을 한 움큼 올린다. 그래 이 맛이야. 죽은 빨리 소화돼.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에 참석했다. 같은 호텔 식당이다. 조식과 중식은 라인업이 다르다. 아침을 푸짐하게 먹었으니 점심은 가볍게 먹기로 한다. 아뿔싸. 생맥주를 제공한다. 생맥주를 한 컵 따른다. 손가락에 차가운 생맥주가 만져진다. 탄산의 상쾌함이 극대화된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포가 저온에 머문다.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넘긴다. 키아- (현대기아차의 기아가 아니라 맥주의 상쾌함이 만든 감탄사) 점심은 술상이다. 맥주 안주로 어울릴만한 친구들로 그릇을 한가득 채운다. 냉채 족발, 깐풍기, 깐풍 새우, 탕수육, 안심스테이크, 양갈비 등을 담는다. 양고기 위엔 쯔란 1 티스푼 정도를 뿌린다. 맥주 한 모금 하고, 안주를 먹는다. 한 모금 한 모금 넘기다 보니 컵도 그릇도 빈 공간만 남는다. 다시 맥주 한 잔과 안주 세트를 채워 자리로 돌아온다. 부른 배를 잡고 자리를 뜬다. 나오는 소리는 물론, 아이고아이고~
친구가 마련해 준 레지덴셜 호텔에 호주 친구들과 함께 이동한다. 숙소에 들려 짐을 두고 곧바로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한다. 2시 예식이고 점심 식사를 3시 넘어서 시작했다. 4시까지 먹고 마신다. 저녁 예약은 6시다. 호텔에 체류할 시간이 없다. 소화 시킬 시간은 사치다. 택시를 불러 곧바로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한다. 지역 맛집인 복집이다. 복어 풀코스가 밥상 위에 올라온다. 복어 껍질 무침, 복어 튀김, 복지리, 복어 불고기, 볶음밥이 차례로 나왔다. 밥상에 복이 들어온다. 들어온 복 놓칠 수 없어 부지런히 몸 안으로 밀어 넣는다. 3시간 넘게 먹고 마신다. 더 들어갈 수 없다고 사정하는 위장을 무시한다. 안 됩니다. 안 돼요. 돼! 카리스마 있게 맥주를 들이붓는다. 복어 볶음밥으로 마무리한다. 택시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호텔에 도착해 파티가 열린다. 각종 과자와 술을 한가운데 놓는다. 열명 넘는 호주 출신 하객들이 술판을 벌인다. 더 이상 음식은 못 먹겠다- 다 같이 말한다. 신랑이 족발 보쌈 세트와 편의점 라면, 핫바 등을 한가득 들고 온다. 마피아 게임과 각종 술 게임으로 이 밤의 끝을 잡는다. 끝을 잡는 도중에 자기도 모르게 끝 말고 젓가락도 잡는다. 젓가락에 집히는 불보쌈과 족발, 쟁반 국수, 홍게 라면, 허니버터칩을 마땅히 둘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입으로 넣는다. 잠시 위장에 보관할게. 이거 엄마가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너 필요할 때 돌려줄게- 절대 돌려받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 맡긴 설 세뱃돈처럼 한 번 들어간 음식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위장은 아침 8시부터 다음날 01시까지 풀가동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소년 직공은 과로에 시달렸다. 최소한의 수면을 보장받지 못 하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결혼식 당일 위장은 소년 직공처럼 노동했다.
다음날엔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됐다. 호주에서 온 친구는 열 명 남짓. 먼 길 와준 만큼 제대로 보답하리- 신랑신부의 각오가 느껴지는 일정이었다. 먹고 이동 마시고 이동 먹고 이동 먹고 마시는 일정이다. 우걱우걱 음 맛있네. 자 이동하겠습니다. 부릉부릉- 도착했습니다. 드세요 이 음식은 대구에서 유명한 0000입니다. 우걱우걱 음 맛있네. 자 이동하겠습니다. 부릉부릉- 도착했습니다. 드세요 이 음식은 대구에서 유명한 0000입니다. 우걱우걱 음 맛있네.
대구를 떠나는 날이 됐다. 이제 더는 안돼. 위도 쉬어야지. 대구를 벗어나야 원래 식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 배낭에 공간이 없다. 한 친구가 대구를 떠나며 남은 이들을 위해 성심당 튀김 소보로 세트를 두고 갔다. 한 박스를 배낭에 넣었다. 배낭에 짐을 더 넣어야 한다. 하는 수없이 박스에서 소보로를 하나씩 꺼내 입에 넣는다. 한 개 반이 남았고, 봉투에 담아 다시 배낭에 돌려 넣는다. 이제 배낭에 공간이 좀 생기네.
한 번 위장을 늘려 놓으니 좀처럼 소식이 되지 않는다. 굶거나 소식하며 정상 체중으로 돌아갈 의지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평범한 한 끼를 먹는다. 서울에 올라가 횟집 특선 회덮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저녁엔 치킨과 다이어트용 밀키트 하나를 먹었다. 한 끼로 먹는 밀키트를 치킨 반 마리와 함께 곁들여 먹었다. 더 이상 다이어트란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여행지에 오면 새로운 자극이 한가득이다. 평소에 못 먹었던 음식이 저렴한 값에 산재한다. 멜버른 출신에게 한국 외식비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반값에 먹을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환경이 과식을 만든다. 한 달 전에 뒤룩뒤룩 쪄서 호주로 돌아갔다. 한 달 동안 식단 관리하며 원래 체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