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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14. 2023

장마와 집중력

시선 21화 [장마] by 색시

주간 <시선> 스물한 번째 주제는 '장마'입니다.



부산 이튿날, L과 계속 붙어 일하던 직원이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아 L 역시 밀접 접촉자가 되어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즉시 신혼집이 아닌 본가로 피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전국적으로 장마가 시작되어 부산 역시 비가 신나게 쏟아지고 있었고, 마감에 역병 스트레스까지 얹어진 L 걱정에 살짝 가라앉은 나는 쓰나 마나한 우산에 비 다 맞은 캐리어를 달달 끌면서 서울로 향했지. 


부산으로 출발하던 날, 허둥대며 커피를 사느라 카드기에 그대로 끼워 놓고 온 신용카드를 유실물 센터에 맡겨 놓았으니 서울 도착하면 꼭 가져와야지 했는데 선장도 알지, 짐도 많고 생각도 많으면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거.. 


장마는 여기에 짐을 두어 개 얹어준다. 하나는 우산, 또 하나는 ‘최대한 덜 젖고 싶는 방법’에 대한 생각. 유실물 센터 위치를 전화로 그렇게 숙지해 놓고는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장마로 불어난 강을 건너왔지 뭐야.


출가한지 어언 4년째가 되었지만 내 방엔 다행히 침대와 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어, 수험생 기분으로 며칠 머무르기에 딱인 환경이었어. 깨끗하게 빤 걸레로 책상, 의자, 방바닥 한 번씩 훔치고 구석 여기저기 널려 있는 귀여운 벌레 사체들 모아 치우고 짐 풀고. 거미줄들은 감성과 모기 살생을 위해 남겨 두었어. 자 이제 6평짜리 오래되고 휑한, 창이 큰 고시원이다 생각하고 공부에만 전념하자 했지. 



내 방이 원래 선장네 집 뷰였던 건 알고 있지? 예쁜 붉은 벽돌 건물 파*빌라는 이제 온데간데없고 너도 온데간데없고 중세 시대 요새 같은 회색 어*하우스와 그 서늘한 느낌을 중화시키고자 원목으로 짜놓은 담벼락 뷰로 바뀌었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가 새로 들어선 저 건물이 유독 차갑고 쓸쓸해. (나보다 지갑 사정이 몇백 배는 안 쓸쓸한 이들이 살고 있겠지만) 파*빌라 보면서 선장도 저기 있겠군 잠깐 외출했으려나 아냐 그 친구는 집순이니까.. 하던 때가 그리워지데. 공부해야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장화 사고 싶다’라는 일념으로 점심 약속에 다녀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어. 많이 편찮으셨다가 겨우 거동을 하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궂은 날씨에 어딜 가신 거지 싶어 황급히 전화를 드렸지. 생각보다 밝은 톤의 목소리로 “여기 대리점이야~ 아빠 휴대폰이 고장 나서. 알지? 그 청담사거리에 있던 (지금은 갤러리아 앞으로 이사 간)” 하고 말씀하시는 덕에 이제 마음이 놓여. 그 대리점 알지 알지, 우리 가족이 약 15년째 거기 사장님만 찾고 있으니. 최근에 내가 여기 사장님께 새 휴대폰을 주문해 놓았는데 역시 울 엄마 딸내미인 걸 아시고 방금 전화 너머로 알려주시더라고. 아직 입고 안됐어요 구하려면 좀 걸려요, 하고.


비 오는 날 오래되고 익숙한 장소에 찾았던 기억들이 몇 있어. 이게 왜 기억나는진 모르겠지만 방이동에 (원래는 삼성동에 있었어) 있는 안경점. 오빠, 나, 아빠가 약 25년에 걸쳐 찾고 있는 곳인데 여길 혼자 갔던 어느 비 오던 날 가게 뒤편 물웅덩이에 발이 빠졌던 기억. 또 엄마와 내가 다니던 동네 치과가 천안으로 이사를 갔는데 굳이 거기까지 찾아가서 내 임플란트를 한 뒤 정기적으로 검진받으러 찾던 중 하루는 비가 내려서 축축한 상태로 적잖이 찝찝하게 고속버스에 올랐던 기억. 모두 짧은 팔이었던 걸 보니 장마의 기억이구나. 아. 공부해야 돼.



비가 잠깐 멈췄어. 이 방에 살 때 북향 창문 열어놓고 하늘하늘 바람 불어오는 거 맞으면서 음악 듣거나 책 읽으면 그렇게 포근했었는데. 오랜만에 그 정취에 빠져보자 하고 창을 열고 바람을 맞으니 4년간 쌓인 먼지와 정체 모를 물질들이 날려 들어와서 바로 닫고 다시 청소했어. 세월은, 돌봄의 부재는, 와중에 잠깐 느낀 장마 중 이 동네의 여전한 공기와 냄새는. 그리고 내 공부는… 하며.


또 날씨가 반짝 개었던 주말, 장마 중 5박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귀가했어. 다행히 며칠 내내 L은 음성이 떴고 1년 전 이맘때 나란히 역병에 걸려 차례대로 센터에 이송되었던 추억은 지금 우리에게 굳센 면역력이란 선물을 남겨주었구나, 싶어. 오늘 이불빨래를 하고 바깥에 널었다가 들여왔는데, 들여온 지 30분도 안되어 다시 비가 쏟아지더라. 장마 사이사이 나는 이렇게 잘 살아남고 있어. 공부는 장마 끝나고 다시 열심히 해보려고. 


이제 서울역에 카드 찾으러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내일까지 안 찾아가면 폐기 처리한다더라. 

선장, 서울역 유실물 센터는 유실물을 일주일만 보관해 준대. 알아둬. 그럼 다녀올게.




추천 음반 : Brad Mehldau [L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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