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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27. 2022

원수가 건넨 달콤함

시선 14화 [새콤달콤] by 색시

주간 <시선> 열네 번째 주제는 '새콤달콤'입니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가장 골머리를 썩이던 건 바로 학업도, 가정사도 아닌 ’스캔들’이었는데 이게 조금 웃겨. 대학입시를 하던 중 좋아하게 된 친구 J가 있는데 딱히 교제 관계까지 진전은 못한 지지부진한 상태로 해가 바뀌고 멀어졌어. 내 딴에 20대 통틀어 가장 좋아했다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애정이었지만 그 당시엔 알 턱이 없지, 정의 내릴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그건 드문드문 오기 따위로 발현되기도 했어. 


현역도 아닌 삼수생의 입시는 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속을 유영해. 그러다 보니 내가 수시에서 그 친구네(는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학교에 낙방했을 때 했던 바보 같은 선택은 ‘잠수’였다. 너무 좋아하니까 제대로 벽을 두지도 못할 거면서 내 딴에 부서진 자존심은 회피 본능을 극대화했지. 그렇게 서먹해진 사이인 채로 내가 정시에 원하던 다른 대학엘 합격하고 용기 내어 먼저 연락을 시도했지만 어라? 반응이 영 시원찮게 느껴지는 거야. 그 친구가 내 가을날의 어리석은 행동들에 실망을 했는지, 그 사이에 흥미를 잃었는지, 하필 많이 바쁜 시기인지 어쨌는지.


그러다가 남자친구가 생겼어, 입학을 앞두고 놀러 갔던 어떤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알게 된 S 군. 하필 J와 대학 동기에 서로 아는 사이였고 내가 작년에 그와 소위 말해 ‘썸’을 탔단 사실을 공공연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좋으면 무슨 상관이냐며 듬직했던 모습에 반했지. 그렇게 입학 후 어느 봄날 주말에 J한테서 전화가 오데, 받아보니 대뜸 축하한대. 빙빙 돌리다 꺼내는 “S 군 정말 착하고 좋은 앤데 잘 해봐, 축하해.”라는 말에 유치하게 오기 발동하여 나는 “어 고마워 너도 신입생 후배들 들어왔을 텐데 예쁜 친구 하나 만나서 잘 해봐”라며 받아쳤지.


소문의 근원지는 아직도 잘 몰라. 그저 어쩌다 보니 나는 그들의 학교, 그 학번들 사이에서 이상한 애가 되어 있더라고. J를 꼬시다 잘 안되니까 그의 동기 S를 꼬셔서 사귀는 애. 사람 갖고 노는 애. 

어린 나이의 연애가 뭐 진지했겠어, 몇 개월 만에 S와 헤어지고 나니 소문에는 그럴듯한 살이 추가되어 이상한 애에서 미친 X으로 승급이 되어 있었지. J를 꼬시다 잘 안되니까 그의 동기 S를 꼬셔서 갖고 놀다 둘 다 갖다 버리는 미친 X. 나랑 대화 한 번 제대로 안 나눠본 사람들까지 내 욕을 퍼뜨리기 시작했어,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그걸 생각도 못 한 곳에서 생각도 못 한 이들에게 전해 듣고 있었고.


그중에서 내 한 학번 위의 선배와 연애 중이던 H의 전파 활동은 유독 활발했다. 그 당시에 이 선배는 내 인사 한 번을 안 받아줬고 H와 엮인 지인들은 모두 나를 피했지. 대놓고 H에게 들었다며 이야길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대체 무얼 잘못했을까, 한창 예민할 20대 초반에 울기도 많이 울고 괜히 눈치 보고 스트레스 엄청 받았지. 지금 같았으면 이게 바로 노이즈 마케팅이다 하며 사업을 재개하여 (…)


겨울이 왔고 실음과 정시 시즌이 되어 나는 한철 장사인 입시 반주를 뛰러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있었을 때, 모 학교 대기실에서 H를 만났어. 그 사람도 나도 파트가 피아노라 우리가 반주하는 보컬 입시생이 동시간대에 걸리면 같은 대기실을 쓰거든. 나보다 연장자니 눈이 마주친 이상 인사는 해야겠고, 기분은 썩 별로지만 사회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던 내 안면 근육은 나름 긍정적으로 움직이는 우스운 모양새였다. 대기가 길어 자리에 앉아 바닥을 보곤 꽤 오래 앉아있는데, 내 시야로 쑥 들어오는 새콤달콤 딸기맛 하나. 

고개를 들어보니 H가 덩치와는 안 어울리게 분홍빛 자그마한 새콤달콤 하나를 건네며 서 있었다. 미묘한 엷은 미소와 함께 별말은 없이. 아주 잠깐 멈칫하곤 “가, 감사합니다” 하며 건네받으니 바로 자리로 돌아가 앉던 H. 긴 대기 시간 동안 입이 지루했던 터라 바로 까서 넣었는데, 와, 달콤하데. 


새콤함은 기억나지 않아. 분명 ‘새콤’달콤인데, 새콤함은 진작에 그의 뒷얘기들로 적잖이 맛본 다음이라 그랬을까,  달콤함이 쫀득하게 입안 가득 퍼지는 유쾌함을 최대한 즐겼다. 왜 그렇게도 내 얘길 하고 다녔을까, J를 좋아했을까, S를 싫어했을까,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새콤달콤은 왜 주었을까, 실제로 마주친 적은 이게 겨우 두 번째인데 하도 입에 자주 올리다 보니 내게 내적 친밀감이 커져서 반가움의 표시로 주었나, 아니면 그간 얘기하고 다닌 거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였을까나 아무렴 - 질겅질겅.


지금이야 아무 감정도 없고, 그럴 수도 있지 싶지만 그 당시에 나는 H를 미워했을 거야. 그런데 그날, 내가 맡은 학생의 순서가 되어 먼저 대기실을 나오며 H에게 건넸던 눈인사는 그렇게 날이 서있지 않았어. 만났을 때 했던 인사처럼 인위적이지도 않았고,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며. 나, 속이 너무 없나? 고작 새콤달콤 하나에 퍽 괜찮아졌다고? 웃기지만 진짜야. 


악의.라는 게 있었을까, 그저 어린아이들이 호기심에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과 같은 걸 거야. 저 사람은 그냥 그렇게 되어서 내 얘길 하고 다녔던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개미가 아니니까 밟혀 죽을 일은 없고 새콤달콤을 왕 - 맛있게 먹었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대기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새콤달콤이 맛있어서였는지. 


그럴 수도 있지. 




추천 음반 : 성시경 1집 [처음처럼]

스무살의 J가 버스 뒷좌석에서 이어폰을 나눠 주었을 때 귓가에 울리던 곡,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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