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인장 Sep 12. 2022

어떤 소리라도

시선 11화 [목소리] by 선장

주간 <시선> 열한 번째 주제는 '목소리'입니다.




[첫 목소리]


색시야. 녹음된 너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를 기억해?


딱히 큰 기대가 없었는데도 나는 내 목소리가 실망스러웠어. 마치 사진관에서 급히 찍은 증명사진 속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았지. 특히나 얼굴형 보정을 용납하지 않는,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고 귀 뒤로 넘긴 채 찍은 여권사진 같이 말이야. 입국심사에서 오해받지 않을 만큼 정직해 보이는 그 날것의 모습은 사실 그닥 반갑지 않잖아.


대학교 때 MSN 메신저가 유행했는데, 친구들과 시답잖은 음성 메시지를 보내면서 놀았던 적이 있어. 내 목소리에 학교 선배가 ‘초등학생 남자아이 같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의아해 녹음된 메시지를 다시 들어봤지.


그리고는 살짝 충격….그래도 그보단 예쁠 줄 알았는데…..




[취향껏]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쥐고 처음 한 소절을 내뱉기 전, 은근 떨리잖아. 현실 사운드보다 조악할 수밖에 없는 기계식 재생인걸 차치하더라도, 어색한 울림에 서서히 내 목소리를 신경 쓰며 조정하게 돼. 그럴 때 보면 내가 무의식 중에 내고자 하는, 이상형의 목소리 톤이 있어.


우리 중학교 동창 중에 유지O 라고, 혹시 기억해? 색시와 같은 성당에 다녔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지O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늘 갖고 싶었어. 옥구슬 굴러간다는 게 이런 걸까, 싶은 티 없이 낭랑한 목소리. 그런 깨끗하고 톤이 높은, 맑게 울리는 목소리는 평범한 대화를 나눌 때에도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양 들렸어. 재잘거리는 것 같은 음성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동경했어.


그런데 이상하지? 이제는 다소 낮은 톤의 목소리가 매력 있게 느껴져.


어느 순간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주연 여배우의 목소리가 높으면 집중이 안돼. 사실 통통 튀는 목소리이기에 딱 맞는 배역과 장르가 있을 텐데도, 영상을 볼 때면 배우 수애의 목소리처럼 차분하게 울리는 음성에 훨씬 끌려. 드라마에서 수애가 농담을 하는 씬조차 어떨 땐 시를 읊조리는 것 마냥 들리더라.


그러고 보면 아나운서나 기자들도 낮은 목소리를 내잖아. 아무래도 낮은 목소리가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우리는 보통 감정이 격앙됐을 때 하이톤의 목소리가 나오곤 하니, 높은 피치는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느낌을 주는 걸까. 그래서 말의 내용도 가변적일 수도 있을 거라는 불신이 무의식 속에 깔려있는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그런 낮은 목소리에 살짝 긁는 듯 한 허스키함이 한 방울이 들어가면 바로 또 시선, 아니 달팽이관을 잡아끌어. 깔끔하고 단아한, 고고한 중저음과는 사뭇 다른 매력이 생기는데, 깊이 숙성된 와인의 미세한 탄닌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섹시한 목소리처럼 말이야. 영화 <그녀>의 8할은 요한슨의 목소리가 다 했다고 봐.




[그러지 말지]


이렇듯 아름다운 목소리는 축복이야. 오죽하면 마녀가 인어공주의 고운 얼굴 대신 목소리를 빼앗았겠어. 다행인 점은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피치를 조정해 원하는 소리에 가깝게 낼 수 있다는 점.


친언니가 남자 친구와 전화할 때면 돌변하는 목소리에 질겁했던 때가 기억나. 하지만 사실 나 역시 친구용 목소리와 연애용 목소리는 따로 있지. 열정적이고 똑 부러진 척하는 회사용 목소리도 당연히 따로 있고.


그렇게 목소리도 대화 상대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질 수 있기에 참 유용한 가면이 되기도 해. 음성은 성형을 할 수 없지만 그때그때 내 마음대로 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주제에 맞게 오랫동안 묵혀뒀던 애니메이션인 <목소리의 형태>를 봤어.



주인공인 ‘니시야마 쇼코’는 청각장애인 여고생인데, 사람들과 소통할 때에는 공책에 그때그때 수기로 써서 대화를 해.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용기를 낸 쇼코가 좋아하는 남학생한테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나오지.


쇼코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들을 방도가 없잖아. 그래서 우리가 보통 듣는 사람들의 음성과는 사뭇 다른, 다소 서툰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 그리고는 사랑스러운 쇼코는 남학생한테 “내 목소리 이상해?” 하고 물어.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싶어. 그런데 거기서 철없는 남학생은 “응,” 하고 대답을 해버리고 말아.  


아. 그러지 말지.




[목소리의 형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가면을 쓸까’의 고민은 얼굴이 없기에 단 하나의 가면도 가질 수 없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기만인 듯 해. 청각장애인 주인공이 힘겹게 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더 나은 음색과 어투를 잠시 고민했던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웠어.


 어떤 소리라도   있다면 거품으로 사라지더라도 마지막 구조요청은   있는 거잖아. 그러니 목소리는 소통  자체로서의 가치만으로 충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 쇼코가 헬륨 풍선 가스를 마시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는건 어쩔  없네. 정말 밝게 웃을 것 같거든.




관련 영화: <목소리의 형태, 2017>


작가의 이전글 목소리에 대한 단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