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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Aug 29. 2022

목소리에 대한 단상들

시선 11화 [목소리] by 색시

주간 <시선> 열 한번째 주제는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로 무언갈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능들 중 하나를 잃어야만 한다면 가장 먼저 포기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목소리. 이 아이러니는 뭘까. 가장 소모적인 것, 소모적인 것들 중 가장 능력치가 뛰어난 것?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 악기, 재능의 창구. 동시에 대역 죄의 수단. 


목소리 탓에 가까워지지 않던 이들도 있었다. 선장도 그럴 때 있지 않아?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목소리가 영 귀에 와닿질 않아 선뜻 손 내밀기 어렵던 때. 물론 목소리 덕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던 이들 역시 있었지. 소리의 재질뿐 아니라 속도와 호흡, 톤에 맞게 잘 고른 단어들은 사람을 끌어당겨.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신기한 구석이 있어. 본가에 살 때 걸려오던 집 전화를 여보세요 - 하고 받으면 비비안나 (어머니 세례명), 저예요 - 하던 분들이 몇 계셨다. 엄마와 나는 마흔한 해가 차이 나는데도. 엄마의 말투를 따라 하려 노력한 적 역시 한순간도 없고 말이야. 


누구였는지 전혀 가늠 가지 않는 어떤 목소리가 전화하여 대뜸 사랑 노래를 불러준(불러댄) 적이 있었다. 가사 내용으로 보아 연하였던 것 같은데, 노래도 곧잘 했고 음성도 썩 괜찮았어. 가족들과 저녁식사 중 받아서는 부엌에서 나와 노래가 끝날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들었다. 노래가 다 끝나면 무어라 코멘트라도 하려 했더니 곧바로 “좋아합니다!” 소리치고 뚝 끊어 버리더라. 실력으로 보아 굳이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전화하지 않았어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누군지 밝히고 인사 한 마디 나눴어도 좋았을 텐데 용기가 부족했나 봐. 소리 하나에 얼마든지 감응하는 울림이 늘 내재되어 있던 고등학생이었는데 나. 


목가적인 목소리와 선득한 목소리는 톤도 그렇지만 그 내용으로 나누어지기도 하더라. 사랑, 사랑해, 사랑해요, 사실 좋아했어요, 보고 싶었어요, 내가 미안해요, 만나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 그쪽을 만나고 있는 나 자신이 불쌍해요,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분명 사랑이 존재했는데 이젠 없어졌어요, 한국인이라고 된장찌개만 먹으면 질리잖아 가끔 피자도 먹고 햄버거도 먹어줘야지 너는 된장찌개야,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음 역시, 후자의 목소리는 이제 안 듣고 살아도 충분해).


공기가 차가워지면 떠오르는 목소리. 음악을 전공하고 돌아다니며 무수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이성의 목소리에 취해 끌린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빼고. 


메일함으로 날아온 한 친구의 노래를 10년째 간간이 꺼내 듣고 있다. 뭐가 그리 특별했는지 당최 모르겠지만 특유의 까슬하며 담백하고 시원하게 뻗던 그 목소리가 좋았다. 이렇게 노래할 줄 아는 친구라면 뭐라도 괜찮았는지 꽤 두근거렸던 기억이야. 그 목소리에 내 피아노 소리를 얹었을 때의 박동이 꽤 오래 가네, 이 친구가 내게 보내주었던 그 파일처럼 발라드 판을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불러달라 하려고. 


그러고 보니 초가을의 문턱에서 떠오르는 목소리가 하나 더 있어. 노래하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로 화성학을 알려주기도 하고, 자기가 음악을 하게 된 경위를 위트 있게 풀어 놓기도 하고, 학교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들 조심스레 털어놓기도 하던. 수다스러운 친구는 아니었던지라 종종 아무 말도 안 하고 야경을 응시한다거나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 대신 밤새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거나 했는데, 그 침묵도 악기 소리도 전부 이 친구의 목소리와 기분 좋게 어우러져 그리운 중저음의 톤으로 계속 남아있어. 목소리 안에 그 아이의 든든한 뒷모습도, 예쁜 옆모습도, 손가락의 움직임도, 옷에서 나던 섬유 유연제 향기도 모두 들어있다면 어떤 느낌인지 조금 알 것 같아?


그리고 선장, 나는 네 목소리가 좋아. 깐 달걀마냥 말끔한 피부에 깊은 눈, 빚은 듯 똑떨어지는 코, 신중해 보이는 입 모두와 어쩜 그리 잘 어울리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밸런스’에 목소리도 크게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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