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현실은 달랐다
잔잔한 음악. 이왕이면 클래식이면 좋겠다. 사계 <봄> 정도? 향긋한 커피내음. 손수 내린 드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메리카노 정도면 OK! 아침 7시에 일찍 문을 열고, 10분 깨끗이 청소. 에이 기분이다. 옆가게 마당까지 쓸어 준다. ‘오늘은 어떤 아이들이 찾아올까’ 부푼 기대감에 문방구의 아침을 맞는다.
아침 7시 40분.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한둘씩 찾아온다.
“경호야! 안녕, 아침은 먹었어?”,
“수영아! 어젠 안 왔네! 새로운 과자 들어왔는데.”,
“재영아! 오늘 준비물 다 챙겼어?”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문방구 사장이 있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던 시인의 낯간지러운 표현을 들먹이진 않더라도,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의 의미가 되어 준다. 그들은 또 나의 의미가 되어 가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려 더 크게 인사한다.
“학교 잘 갔다 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주며.
어머님들에게도 싹싹. “재영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아침에 애들 준비물 챙기고 힘드시죠?”, “수영이 어머님 안녕하세요. 애가 셋이라 정신없으시겠어요?” 잠깐이지만, 이곳은 동네 마실 장소로 충분하다.
좀 정신없었던 아침 장사가 끝나고, 이젠 나만의 시간. 클래식을 끄고, 내가 좋아하는 인디 음악으로 교체. 볼륨도 좀 높인다.
“출발을 알리는 경쾌한 총성~~~(페퍼톤스, <Ready, Get Set, Go!>)”
얼마 전, 새로 구입한 노트북을 펼친다. SNS를 하며, 어젯밤 올린 글의 댓글 확인. 댓글을 다시 달며 친구들과 소통은 필수다. 블로그도 연다. 밀린 포스팅. 서평, 영화평, 사는 이야기... 글 쓸 재료는 충분하다. 이웃블로그도 방문하는 여유도 부린다. 아내가 싸 준 맛있는 과일은 충분한 비타민. 다음 순서는 재고 파악. ‘빠진 물건이 뭐가 있나?’ 샤프심 하나까지 놓칠세라 제법 꼼꼼하다. 이젠 유치원에 아이를 등교시키는 어머니들의 방문.
“정우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 모든 소리는 ‘개뿔’! 클래식에 아메리카노는 무슨. 여기는 전쟁터. 7시에 가까스로 일어나, 세수 간신히 하고, 아침 먹는둥마는둥 하고 허겁지겁 집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7시 30분. 7~8분 거리의 가게에 도착, 허겁지겁 문을 열고, 거스름돈 금고에 넣고, 아침 준비물 챙겨 놓으면 7시 45분. 그때부터 손님(이라고 쓰지만, 악동이라고 읽는다)이 들어 닥친다. 이 말 외에 다른 표현은 없다. ‘들어 닥친다’.
“아저씨(사장님이라고 공손히 부르는 사람은 없다). 고무찰흙 어디 있어요?”, “샤프심이요.”, “스카치 테이프요.”, “4절지요”, “컴싸(컴퓨터 싸인펜)요.”, “실내화 240이요.”, “새로 나온 딱지요.” ...........
무차별 폭격. 자비도 없는 놈들! 난 혼잔데 그렇게 멀티 스테레오로 공격해 오면 어쩌잔 말이냐? 순간 카운터 앞은 아비규환. 손과 손이 엉키고, 말과 말이 엉키고, 돈과 돈이 엉킨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시침이 정지한 듯 시간은 더디 간다.
이름을 불러준다고? 다시 한 번 개뿔! 그런 낭만은 잊은 지 오래다. 내가 살아야 되는데, 무슨 이름을 불러 주나? ‘수영, 재영, 경호’ 대신 ‘야!’라고 안 부르면 되는 거지.
8시 30분. 정신없던 아침 등교 시간이 마침내 지나간다. CCTV를 되감기해 내 모습을 재생해 본다면 성능 좋은 기계가 보일 것. ‘정확한 가격 알려 주고(가끔 틀리기도 한다), 위치 알려 주고(직접 찾아가서 챙겨주는 친절도 가끔 발휘), 돈 받고, 거스름돈 주고, 인사하고, 또 가격 알려 주고...’ 그렇게 수십 번 하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무더위가 지나간 늦여름임에도 옷과 얼굴은 온통 땀범벅. 하루에 두세번 씩 샤워해야 한다.
식은 맥심 커피를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때. 어젯밤 늦게 먹은 야식과 대충 때운 아침식사와 커피가 삼위일체가 되어 내 뱃속을 뒤흔든다. 마치 노랫가사처럼.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금고를 잠그고, 문을 잠그고 찾아간 화장실. 휴~~~ 담배 연기가 아닌, 한숨을 내쉰다. 반복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나이 38. 10년 다니던 회사를 사직하고, 자신 있게 출사표를 던진 곳은 6평 남짓한 대전의 문방구. 때론 재밌고, 때론 눈물겹고, 때론 화나는 문방구 라이프. 물론 아직까진 화나는 일이 팔할. 약간 ‘낭만’을 가지고 이 업계에 뛰어들었나 보다. 잘 몰랐기에 뛰어들 수 있었겠단 생각도 든다. 그래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고, 낭만을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글 쓸 재료를 얻었다는 것이 하나의 증거 아니겠는가.
정신없고, 치열한, 하지만 어린이들의 순수함이 살아있는 이 곳, 문방구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이름하여 ‘문중일기’. 너무 거창하다고? 피까진 아니더라도 땀으로 썼단 말이다. 이해해 주시길. 개봉박두!
* 5년 전. 문구점 처음 시작할 때 쓰고, 오마이뉴스에 투고했던 글이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많이 안정되었고, 적응했다. 이때 글을 보면 어설펐던 장사 풋내기의 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