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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율 Oct 18. 2024

"내 몸이 두 개로 쪼개지면 좋겠어."

모든 처음을 함께할 수 없는 슬픔


그런 표현을 잘 안 하는 무던한 사람 입에서 나온 말에 내심 놀랬다.

"여보 많이 힘들지.. 일하면서 집안일도 같이 하고 또 놀아주느라."
"그런 게 아니라. 크는 걸 못 보니까 곁에서. 같이 시간을 못 보내는 게 아쉬워."

내가 아이의 수족구와 동시에 유선염으로 몸져누웠을 때 휴가를 내고 아이와 나를 돌봐야 했던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난 아파도 안 돼. 돈을 벌어와야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강해져야겠다고, 내가 그를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준비기부터 임신, 출산을 거치며 나는 늘 돌봄을 받는 대상이었고 약자의 입장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내가 돌본다는 생각보단 함께 지낸다는 생각이 더 강했고 여전히 나는 누군갈 돌보는 일에 어색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나를 먼저 돌봐야겠다고 생각한 이후로 아이와 그를 돌볼 여력을 낼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돌볼 줄 몰랐기에 다른 이를 돌볼 줄도 몰랐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사랑하기 어려운 것처럼.

아이에 대한 사랑이 나보다 모자라지 않음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엄마인 나 대신 일을 하는 역할을 맡은 그의 슬픔과 외로움, 무게를 느껴 짠하다. 왜냐하면 그가 나보다 아이를 더 잘 돌볼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나와는 달리 누구보다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성격인지라 육아휴직에 최적화돼 있는 건 나보다 그였다. 내가 돈을 그보다 더 잘 버는 직업이었다면 그에게 육아휴직 기회를 넘겨줄 수 있었을까.

원에 아이를 보내고 말이 늘면서 신기하던 시기가 지나고 언젠가부터는 답답함이 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어떤 경험을 했기에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하고 슬펐다. 저 소리를 처음 내던 순간에 내가 함께 했다면 난 무조건 알아들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너무 빨리 아이를 떼어 놓은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그의 맘을 너무나 잘 알겠다. 아이의 모든 처음을 함께할 수 없어 외롭고 슬픈 엄마의 마음 너머엔 시간이 갈수록 공고해지는 아이와의 애착관계에 대한 자신감도 사실 함께 커가고 있다. 아이는 아빠를 격하게 좋아하고 반기지만 잠깐 들렀다 가는 친구나 손님 같기도 하다. 아이의 정박지는 엄마다. 잠 올 때 배고플 때 무서울 때 속상할 때 엄마를 찾는다. 변함없는 아이의 사랑에 나 또한 안정감을 느낀다. 이런 게 '애착'이구나,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하고 안정된 관계, 그래서 육아에서 애착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구나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빠와의 애착을 위해 내어 주었던 저녁 목욕과 밤잠 입면을 엄마인 내가 가져왔다. 퇴근 후 아빠의 쉼을 위해서다. 덕분에 아빠는 한결 편안해 보인다. 돌아보면 목욕과 재우기는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에게 맡기느라 투닥댐이 더 많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랑으로 책임을 다하려는 아빠였지만 나날이 다른 폭풍 같은 아이의 변화를 내내 지켜보지 못했기에 잔뜩 긴장해 있다. 종일 어른들 속에 있다가 작은 사람을 만나며 갑자기 모드를 바꿔야하는 그의 어려움과 당혹스러움, 반가움을 어렴풋이 이해함에도 그의 날 선 말들에 나 역시 하루 중 육아피로도와 스트레스가 가장 높았다. 종일 그를 기다렸지만 한편으로 그가 오기 전에 가장 긴장하기도 했다. 그가 오면 맡기고 쉬고 싶었으나, 나에겐 '맡겼지만 쉴 수 없는 저녁 시간', 그에겐 '퇴근했지만 퇴근하지 못한 저녁 시간'이 계속 되면서 우리 둘 모두의 불만족스럽고 평화롭지 못한 저녁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음을 바꾸니 저녁이 행복하다. 그의 퇴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나와 아이를 돌볼 구원자가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돌봐야 할, 일에 지친, 사랑하는 이가 오는 것이다. 나는 결승점을 앞둔 단거리 달리기 선수같은 마음을 내려놓고 잠들기 전까지 여유있는 마라토너가 되기로 했다. 육아를 계속하면서 그를 위한 저녁에 집중한다. 아이만 생각하다가 그를 더 생각하는 저녁을 보낸다. 그에게 늘 부부중심의 삶을 이야기해 왔으나 정작 준비가 안된 건 나였다. 그보단 아이만을 생각했고, 그를 돌보지 않았으며, 그의 건강을 외면했다.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고 응석을 부려온 내 미숙한 사랑이 미안스럽다.

내 꿈을 응원하지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꽂혀 한참을 그에게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는데 사실 내가 나 자신과 그에 대한 기본적인 돌봄을 다하면 그는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반대하지도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에 대한 서운함은 실은 꿈을 향할 에너지를 내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과 울분이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도 읽지 않던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유일한 사람 또한 그이기도 했다.

다만 사랑하면 된다. 사랑으로 문제를 보면 나아간다. 살아있다.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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