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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uka Azusa Dec 13. 2019

폭풍우가 치는 밤에 #2-06

Chapter 2. 미녀는 미녀를 알아보고 바보는 바보를 알아본다.

  성운이라는 말에 놀란 것은 길영뿐만이 아니었다. 성운 그룹은 성운 통운에서 시작해 한때 오너 일가의 스캔들이 있어 망하니 뭐니 말이 많았었지만 이미 거대해진 기업체는 남은 임원진이 절치부심하여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모기범 전 회장이 자살로 죽고 나서 보수적이고 정경유착을 앞세운 경영을 하던 그와는 달리 새로 성운 그룹 대표이사직에 오른 경영전문인의 공격적이고 획기적인 방식은 오히려 근 5년간 기업으로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내며 역전의 성공신화로 꼽혔다. 성운시에서 시작해 경기권역을 꽉 쥐고 흔들며 전국구로 덩치를 키워가던 기업이 회장 아들이자 자회사의 대표인 모태구의 스캔들로 주춤하다가 경영진의 교체를 시작으로 후발주자로 치고 올라온 에너지 산업에 아낌없이 투자하더니 하한선을 치던 주가를 바로 상향선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국내에서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다들 성운 그룹이라 부르지만, 해외에서는 미연이 말했듯이 오너 일가가 물러나고 이름을 바꾼 SU로 진출을 하고 나서부터가 더 유명하다. 길영이 몰려오는 두통에 옆머리를 짚었다. 성운 그룹이 운수사업부터 시작한 사업을 확장해 건설과 전자, 에너지 방향으로 사업궤도를 틀기 시작할 때 일어난 대형 스캔들. 그로 주저앉을 것 같던 회사의 눈부신 회생에 대한 내부 사정은 길영이 잘 알 수 없던 사정이었다. 오너의 아들이자 차기 회장으로 꼽히던 모 회장의 아들, 남부럽지 않은 부와 학식을 무기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범 기업인으로 알려졌던 그가 성운시에서 긴 시간 동안 이어져왔던 참혹한 미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희대의 스캔들. 그 사건은 돈과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던 것이었는지 모태구 대표이사는 그로 인해 모든 자격과 경영권을 박탈당했다.


  "그때 SU, 아니 성운 회장 모기범 외아들인 모태구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어 감호소에 들어가게 되었다가 중상을 입고 다시 일반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다시 치료감호를 시작한 후 경영선으로는 복귀하지 않은 거로 아는데요."

  "그게 5년 전인데? 지금 실제 대표 이름으로 올라온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지금 SU 전체의 대표로 등재된 김영훈 대표이사 말인데, 예전에 한끝 끝장나게 날렸던 대한 ECC 대표이사 시절부터 M&A와 계열사 조정능력이 능수능란하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곁가지를 쳐내서 기업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타입이었지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인 적은 없었어요."

  "그 말은 그러면,"

  "저 정도로 공격적이고 대담한 경영은 원래 모태구 대표의 방식이에요. 이 바닥에서는 지금 김 대표가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라니까? 뭐 김영훈 이사 실력이 실력이니 아주 바지사장은 아니고 실제 명함에 박힌 '대표이사' 급의 일을 하지 않는 정도겠지만요. 사람이 저렇게나 큰 지시를 내리는 게 과연 누구일까, 하고 의심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윗동네도 윗동네만의 밥그릇이 있는데."


  미연의 말을 듣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던 길영이 파일을 전부 집어 들고일어나자 미연이 바로 길영의 손에 들린 파일을 붙잡았다. 애초에 수민을 위해 깠던 페이지만 기밀정보를 이렇게 홀랑 넘겨줄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파일을 붙잡은 미연의 가느다란 손이 애를 썼지만, 현직 강력계 형사의 완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길영이 갑자기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어 보이자 준호는 제 팔에 오소소 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협력 감사합니다, 라고 크게 외친 길영이 길쭉한 다리로 소리 소문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가자 미연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우아하게 소파에 주저앉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준호에게 돌아가 달라고 힘없이 말하자 그도 두 손을 모아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길영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이마와 눈을 짚은 손을 걷은 미연이 슬며시 웃으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스크린을 톡톡 두드리는 손이 경쾌한 리듬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 누님은 그걸 그렇게 안 된다는데 빼앗아 들고 나오면 어떡해요!"

  "중요해. 꼭 SU가 아니라도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불법체류 조장은 즉시 체포야. 너 지금 대한민국 경찰 앞에서 무슨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너도 같이 잡혀 들어갈래?"

  "저는 왜 잡아넣으려고 하시는데요……."

  "알면서도 괜찮다고 하는 거, 그거 방조고 동조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몰랐으니까 무효입니다."

  "진짜 말이나 못 하면…. 그냥 이걸 콱!"


  길영이 손을 들자 준호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가드를 세웠다. 어이가 없어진 길영이 그가 팔을 내림과 동시에 꿀밤을 먹이자 억울하다는 표정의 준호가 길영을 바라봤다. 대한민국 경찰에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파일을 넘긴 길영이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우지희. 꼭 다문 입술이 작고,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아가씨. 얼마 전에도 만나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떠올린 길영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 들린 파일은 각각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SU의 비리에 관한 서류.

  하나는, 상용시 자갈마당 사창가에 있었 '던' 여자들.




 .. . .. . .. . .. .

  길영이 사흘째 휴가계를 냈다. 한참 수사에 박차를 가하던 길영이 빠지자 수사팀 팀원들은 모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길영이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가장 많은 단서를 찾아왔다는 건 수사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길영이 던져주고 간 파일에는 수많은 사람의 신상이 적혀있어 수사본부 모두가 예의 주시를 하고 있었다. 특히 불법체류자의 신상명세는 쉽게 알 수 없는 부분이기에 수사팀에게 있어 미연에게서 길영이 빼앗아 온 자료는 금쪽과도 같이 귀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자료를 운용함에 있어서 그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길영이 빠져있다는 것은 팀에게 있어서 수사 진척 속도의 문제이기도 해서 모두가 길영에게 돌아오라는 연락을 할까 했으나 재명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길영을 빨리 데려오라는 모두를 만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시각, 길영은 항상 그녀를 만나던 거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좀처럼 쓰지 않던 연차까지 쓰면서. 그렇게 자주 보던 사람이 안 보이니 그것도 기분이 기묘했다. 이상하게 사람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바라면 이루어지지 않고, 포기하고 체념하면 흘러간다. 길영의 인생이 그랬다. 그 어떤 의지도 아니었는데, 바라지도 않은 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마 윤이나 화평도 그랬을 것이다. 순식간에 찾아온 불행은 마치 파도와도 같았다. 불쌍한 세 아이. 죽기 직전에 모두에게 토하듯이 던진 양 신부의 말이 다시 길영의 귓가를 맴돌았다.


  뭐가 불쌍해. 나는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연민한 적은 없어. 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를 연민하기도 힘들어서 내가 연민했던 것조차 외면하려고, 그러니까...


  "저기, 경찰 언니?"


  아. 방금 한 말은 취소. 바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 거, 진짜 취소다.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을 한 번은 믿어주자. 길영은 전봇대에 삐뚜름한 자세로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하고 바로 잡았다.


  "아. 저기, 그러니까."

  "뭐 하고 있어요?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처음 만났을 때 보다 계절은 더 매서워졌다. 해를 도는 이 별이 해에게서 더 멀어지려 하는지 지나간 세월들보다 새 겨울은 언제나 혹독하게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을 벗어난 듯 얇은 트렌치코트를 하나 걸친 그녀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길영은 가끔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던 엄마가 떠올랐다. 계절이 흘러간지도 모르고 세상에 휩쓸리듯, 세상을 헤쳐 나가던 그 뒷모습. 이상하게도 그리운 그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듯 심상의 표층을 뒤덮어서일까, 며칠을 기다린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나서일까. 길영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떨어졌다.


  "다 울었어?"

  "아니, 이게 뭐라고……."


  길영이 울면서 웃자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 오래된 농담을 던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길영은 사진 속의 작은 얼굴보다 훨씬 창백하고 메말라버린 얼굴을 마주했다. 화장으로 가렸지만 확실히 그녀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워낙에 이목구비가 고운 데다 처음 만났을 당시에도, 그다음에도 어두운 데서 만날 때마다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줄곧 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니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지독하게도 깡마른 몸에 납빛으로 질린 듯한 피부를 보고 있자면 영양실조나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 멍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길영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희 씨."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어요. 길영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찾고 있었어요. 우지희 씨.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길영을 달래던 작은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납빛으로 질린 얼굴이 흐려진 것을 놓치지 않은 길영은 지희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허나 산 사람 같지 않은 차갑고도 메마른 피부의 뻣뻣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친 순간 걷어진 소매 사이로 푸른 빛깔의 혈관이 아닌 시꺼먼 혈관이 눌린 모양이 남았다. 너무나 창백한 피부여서인지 손자욱보다 핏줄의 색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길영에게서 멀어지며 높은 구두를 신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도 나지 않는 잰 발걸음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길영이 죽자 살자 기를 쓰고 지희를 향해 달렸지만 어느 골목을 잠시 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감쪽 같이 사라졌다. 땀이 배인 손을 들어 올린 길영은 가쁜 숨을 겨우 몰아 쉬며 고개를 기울였다. 뒤를 쫓는 동안 간격이 좁혀지거나 멀어지는 간극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발이 없는 사람처럼 소리가 사라졌고 시간이 멈춘 듯 쫓아도 쫓아도 같은 모습이 되풀이되었다. 골목길은 고른 아스팔트 길도 아니었고 군데군데 보도블록이 울퉁불퉁하게 덮여 있거나 흙이 푹 패인 곳도 있어 이런 달동네 길은 편한 워커나 운동화를 신은 길영도 땅을 잘못 딛는 순간 발바닥으로 통증이 올라올 때가 많다.
 
  어지간한 범인을 잡느라 건물 한 층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리는 길영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그녀의 체육 선생이 단거리 육상 선수를 시키려고도 했을 정도다. 다른 건 몰라도 순발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다. 발목을 감아주는 스트랩 하나 없는 높은 펌프스 구두를 신은 여자. 바싹 말라 곯은 몸을 가진, 저보다 신장도 훨씬 작은 여자를 이런 식으로 하나 쫓지 못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아주 마지막, 그 짧은 순간에 어디 숨어 들어갈 틈도 없는 담벼락만 이어지는 길에서 사람을 놓쳤다. 그렇게나 치열하게 달렸는데 숨은 사람의 가쁜 호흡 소리 조차 전혀 들리지가 않아.

  그러니까, 이건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 . .. . .. . .. .
  "요즘 형사 누님 안 오시네."
  "대체 아가토 신부님께서는 왜 여기에 따라오시는 겁니까?"
  "여기에 오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현대 가톨릭은 타 종교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는 종교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당 집에... 신부가,"

  능청스러운 준호의 말에 무당집에 정작 몸을 맡기는 주제에 투덜거리는 수민까지. 그 둘을 바라보던 윤보다 먼저 질린 것은 의외로 화평이었다. 해신이 몇 번이고 저 시꺼먼 사제 녀석들은 언제 가냐며 역정을 내니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화평만 죽어나는 것이다. 화평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윤은 둘째치고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이 곳을 찾는 준호에, 일단 혐의는 벗었다고는 하나 제 임무가 있어 한동안 이 근방에 있어야 하지만 성당에 정식으로는 갈 수 없는 사고뭉치를 관리하기 위해 윤이 이 집에 던져둔 수민까지 가세하니 오죽할까. 제 신당에 다른 신을 모시고 있는 사제가 둘이나 더 들어와서 노닥거리니 해신의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닌 탓이다. 툴툴거리는 해신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화평은 멍하니 대문만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멀대만 좋은 신부들에게 넉살 좋게 받아치며 마늘이나 까게 했을 법인데 이상하게도 화평은 오늘따라 실없이 웃으며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대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평이 해신을 받아 자리를 튼 이 집은 계양진의 옛 집과는 다르게 마당도 좁고 올라오기도 힘들게 바닷 절벽을 낀 언덕배기의 집이다. 화평의 동태가 이상하자 신경이 쓰인 윤이 뭐라 말을 걸려는 순간 화평이 윤을 돌아보았다. 언제 보아도 저 진주빛 눈은 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다.

  "누님이 올 때가 되었는데."
  "바쁘시겠지요. 한동안 뭐가 많다고 그러셨으니까."
  "뭐가 많다고 했지. 많은 건 많은 거지만 그래서 와야 할 텐데 말이야."

  윤은 간혹 화평이 저렇게 말을 할 때면 한동안은 섬뜩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해져서인지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화평이 저렇게 말을 했으니 오늘은 길영이 올 것이다. 신을 섬기는 사제가 이런 것을 믿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가 그러면 그런 것이라 친구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라 그리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때 냐옹, 하고 푹신한 털을 가진 고양이가 윤을 향해 말을 걸듯 울음소리를 흘렸다. 가끔 화평의 마당에 들어오는 누런 얼룩 고양이다. 이제는 완전히 여기가 제 집이라 생각하는지 익숙하게 마루 밑으로 향하는 고양이가 우습고도 귀여웠다. 처음에는 제 집을 찾아온 고양에게 남은 잔반이나 주던 화평의 행동에 기겁을 하며 윤이 읍내에서 저렴하지만 양이라도 많은 고양이 사료 한 포대를 사다 놓은 차였다. 찌그러진 양푼 냄비에 사료를 두 줌 집어 놓아주자 많이 배가 고팠던지 냄비에 코를 묻고 와작와작 사료를 먹는 고양이를 귀엽다는 듯이 보던 차였다.

  "윤화평, 잠시 나 좀 보자."
  "올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누님."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에서 내리더니 숨이 차게 달려오는 길영을 보며 화평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대문을 들어서는 것을 막더니 급할 것 하나 없다는 초연한 표정으로 신당 안으로 들어가 복숭아 나뭇가지를 꺼내왔다. 팍, 하고 내리치는 가지는 소리만 요란했지 보드라운 잎이 달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다. 단, 화평이 휘두르는 나뭇가지 끝은 집요하게 길영의 얼굴 쪽과 오른손을 향했다.

  "누님. 대체 죽은 자를 만나서 무엇하겠다고 그랬어요."

  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이 팔자가 이렇지, 뭐. 화평이 저를 향해 복숭아 나뭇가지로 집요하게 치던 곳은 지희가 저를 만졌던 얼굴과 제가 지희를 붙잡았던 손이었다. 죽은 자라니. 낡은 백열등 마냥 노란빛을 띄는 가로등 아래에서도 창백하게 비칠 정도로 희다 못해 납 같던 피부도, 아무리 추운 곳에 오래 있었다 해도 그렇게까지 차갑지는 못 했을 손목의 서늘한 체온. 심지어 검게 피가 썩어 변색된 피부 아래의 혈관까지. 죽은 사람을 한 두 번 본 길영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만 질 일은 없었지만.

  "거기 오수민 씨."
  "예에?"
  "그때 그 여자, 지금 어딨어요?"
  "그 여자요?"
  "형사 누님 혹시 지금 안젤라 자매님 말씀하시는 거,"
  "그래. 그 안젤라인지 뭐라는 여자. 재수 없는 그 여자 말이야."

  길영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준호와 수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화평의 행동이나 화가 나 검붉게 달아오른 길영의 낯빛이 심상치가 않음을 눈치챈 윤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당들이 쓰는 복숭아 나뭇가지는 삿된 것이 들러붙었을 때 쓰는 일종의 액몰이와 같은 것이다. 무슨 일이 터진 것을 느낀 윤이 화평에게 가지로 맞은 길영의 손목에 제 묵주를 꼼꼼하게 감았다.

  "누구 시기에 형사님께서, "
  "없어. 지난번에 갔던 그 고급 아파트에 다시 찾아갔는데 없었어."
  "천천히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누님이 가져간 그 파일에 있는 여자들, 거의 다 죽고 없어."

  화평의 한 마디에 경악을 금치 못 한 세 신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란 물빛으로 빛나는 눈을 두어 번 끔벅이고 나서야 다시 본래의 호박빛을 찾은 제 왼눈을 쓱 비비던 화평은 손으로 집을 가리켰고 아무 말 없이 다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마루에는 영문을 모르는 고양이만 남아 볕을 쬐고 있었다.


  "여전하네, 정말 윤화평."
  "누님도 알아서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닙니까."
  "알아서... 라기보다, 네가 필요해서 온 게 더 정확한 말이기는 하다만."
  "죽은 사람이 한이 되어 독을 품고 복수귀가 되어 남았는데 그것을 굳이 건드리셨더구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때는 누님께서 그 영가를 달래주고 계셨지만, 이제는 아니네요."

  화평은 신신당부를 했다. 다시는 만나면 안 된다고. 만나서 좋을 수가 없다고. 길영은 이미 생각이 전부 사건으로만 흘러가 화평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고 윤과 화평은 그 낌새를 단번에 알아챘다. 준호도 은근한 눈치를 채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당황해하는 토끼 같은 동생들을 앞에 두고 길영은 머리를 싸맸다. 죽은 사람의 증언이라 할지라도, 그 아주 작은 단서라 해도 너무나 간절했다. 화평의 말이 맞다면 어딘가에서 시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무엇이, 누가, 어째서.

  "윤화평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 다고 묻는 게 이상하지."
  "으음... 뭐 그렇지요, 지난번에 영 좋지 않은 게 묻어왔을 때 낌새만 차렸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은."

  길영이 비장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정확하게 수민을 바라보자 천하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수민도 겁을 집어 먹었다. 제 스승인 문 신부 한정이라지만 쌈닭 기질이 있는 수민을 기억하는 윤과 준호가 눈을 끔벅이자 길영은 당장 일어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다가오더니 화평의 짧동한 후드티를 얻어 끼워 입고 있던 수민의 모자를 질질 끌어당겨 길을 나섰다. 한겨울에 외투도 하나 없이 끌려 나온 수민의 뒤를 쫓은 윤이 흥분한 길영을 달래며 진정을 찾도록 말렸다.

  "갑자기 사람을 이렇게 끌고 나오시면 어떡해요."
  "한시가 급해, 나는!"

  윤이 길영을 말리는 동안 수민이 다시 제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화평은 그저 조심하라는 말만 했을 뿐 신당 밖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길영의 일이라면 만사 제칠 것 같던 화평이 가만히 있자 어쩐지 별 일은 아닐 것 같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된 윤과 준호는 길영의 뒤를 따랐다.



  .. . .. . .. . .. .
  길영이 수민에게 운전을 맡겼다. 조수석에 탄 준호가 뒤를 돌아보자 파일에 몰두한 길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다시 지희의 프로필을 찾았다. 우지희. 1989년 12월 13일생. 89년생이면 지금 기준에서 만 31세다. 허나 길영의 기억 속에서 지희는 훨씬 더 앳되고 어려 보였다. 사진에 찍힌 일시를 알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길영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들의 실체를 알고부터 더했다. 어째서 끊임없이 비극은 만들어지는가. 비극의 발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비극을 종결짓는 경찰이 되었던 이유를 떠올리던 길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수민을 돌아봤다. 이 사건의 얽힘은 수민이 밀수하고자 했던 성물과 관계있었다. 성물. 성물을 구하기 위해 사창가로 들어섰다는 것은 사람과 물건을 다루는 총책이 동일한 단체나 개인이라는 소리다. SU와 관련된 상선들이 개발도상국에서 매춘부들을 사 와 밀항시키는 사람 밀수에 대한 수사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기보다 같이 수사하는 것이 맞았다.

  "오수민씨. 자갈마당에 간 이유가 정확히 뭐 였어요?"
  "파천의 종을 인수하려고 간 겁니다."
  "파천의 종?"
  "처음으로 유럽에서 남미권 국가들에 선교를 시작 즈음해서의 이야기예요. 악마들이 성물이 있는 성당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하더군요. 이야기의 흐름을 보자면 성물 자체가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 중동에서 스페인으로 왔고, 다시 브라질로 가게 된 성물이니까."
  "어쨰서 이름이 '파천(破天)'인 겁니까?
 구마사제로서 저도 어지간한 성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습니다만 하늘이 무너지는 이적 같은 것이 일어났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하늘을 부수는 파천이 아니라, 성당을 부수기 위해 악마들은 믿으려는 마음이 생길까, 망설이는 자들도 무자비로 죽이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믿는 자가 없으니 성소는 주인 없이 빈 자리가 되어 악이 쉬이 깃들었습니다. 그 때 가장 낮고 천한 이들이 도망을 온 후에 일어난 기적이라, 파천(播遷)입니다."

  수민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뒤이어 이어진 이야기의 내용에 모두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이들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깊은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혹자들은 깊은 믿음이 아니라, 가장 처절한 믿음이었기에 거짓 하나 없는 진심만이 남아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지요. 가장 낮은 이들이 가장 귀한 이가 되었고 그들이 가장 고귀한 믿음을 가지고 도망쳐 왔다 하여 파천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국사시간에 배우셨잖아요. 나라의 주인이 도망쳤던 '아관파천(俄館播遷)'. 그나마 교회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해주었기에 그들은 깊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의 주인이 도망쳐 왔습니다.

  그 믿음의 주인들이 매춘부였으니, 아이러니하고도 기이하다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설마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저라고 알았겠어요? 저야말로 지금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수민의 말에 길영은 머리를 싸매었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도 너무나 거짓같은 상황이었으니.





혐생 잠시 종료 ㅇㅅㅇ 지금 밤비 아이템을 얻어 마감을 쳐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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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桃華 明寿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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