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 사랑하고 남편을 이해하게 된 철없는 아내
나와 남편은 동갑이다.
그 표현 한마디에 많은 뜻이 담겨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주 싸운다는 뜻이다.
아니 자주 싸운다기보다는 나의 일방적인 태클이 시작된다.
지겹지도 않은지 나의 태클은 한결같다.
"우리, 대화 좀 해요"
남편은 아마도 이 소리를 가장 싫어할 것 같다. 뭘 이야기하자는 건지. 나는 온종일 기다려서 대화할 시간을 기다렸건만 남편은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른다는 뜻이잖아!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서운했는지 모른다고? 나는 종일 속이 상했는데.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야.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서운함을 어찌할 줄 몰라서 더 속이 상하곤 했다.
온라인에서 무료 MBTI 검사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결괏값으로 궁합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5개의 결과치가 있다.
니맘이 내 맘! 천생연분
아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음!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맞는 부분도 있음!
최악은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님
궁합 최악!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ENFJ, 타인의 성장을 도모하고 협동하는 사람
남편은 ISTJ,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
18년이나 살아봤으면 됐지, 그깟 무료 검사가 뭐라고 두근거리며 좌측과 우측, 나의 MBTI 검사 결과와 남편의 MBTI 검사 결과를 표에서 찾아보았다.
"궁합 최악! 다시 생각해보자"
눈을 씻고 다시 찾아봤다. 좌측, 우측이 바뀌었나?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여전히 우리의 MBTI 결과가 만나는 그 한 지점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설마. 우리 그 정도는 아니잖아?? 하지만 표가 말해준다. 최악이란다. 흥, 칫, 뽕!
우린 2년 전 이민길에 올랐다. 금방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민에 실패하고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고 긴 여행을 다녀왔다고 말한다. 이민이라고 하긴 짧고, 여행이라고 말하긴 긴 시간이다. 6개월.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말한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라고. 우물쭈물하다가 죽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하루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실패하라고. 그 말에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우린 호기롭게 출발했다. 25kg의 수화물 열 개에 우리의 결혼생활 18년을 담아서.
하지만 먼 이국땅에서,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도시에서의 새 출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브리즈번 강을 바라보며 우린 새 희망을 품기보다는 계속 의문에 찬 질문을 하고 있었다. 미세먼지로 가득했던 서울을 떠나서 파란 하늘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냉정했다. 삶의 터전을 옮겨오는 이민은 체감 온도부터 달랐다. 여행이 아니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당신 소원 들어주느라 이렇게 왔잖아. 직장도 그만두고. 근데 이게 뭐야"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날이 선 내 마음을 느꼈을 테다. 그러니 남편은 점점 더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상황을 못 견뎌했다.
오랜 시간 꼼꼼하게 이민을 준비했지만, 현실은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복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던 상황에서 그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게다가 우리에겐 한창 민감하고 중요한 시기를 지내는 학령기의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 아내인 내가 느끼는 그 사랑 타령, 다정한 말 한마디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현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 아주 사사로운 감정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6개월간 우린 많은 것을 잃었다. 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 그곳에서 영어를 배운 게 아니라,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서로의 언어를 배웠다.
나는 남편의 언어를, 남편은 나의 언어를.
나는 더 이상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을 때 마음에 한가득 불만을 담아놨다가
"나랑 이야기 좀 해요."라는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가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다.
"연수야. 오늘 뭐가 서운하구나. 네 마음이 오늘은 힘들구나." 내가 내 마음을 읽어준다. 마법의 주문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 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내가 원하는 말을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듣지 못할 때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나와 대화한다. 내가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내가 나를 안아주기도 하고, 내가 나에게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의 소중한 감정이 타인의 흔들림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세상을 더 너그러운 눈으로 보게 되었고, 삶에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내가 나를 안아주는 순간이 늘어났다.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고, 표현도 다양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남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번역이 필요할 때마다 "파파고 남편 언어 번역기"를 연다. 왼쪽 창에 그의 문장을, 그의 행동을 올린다. 그리고 나의 언어로 해석해보겠다고 내 마음의 엔터 버튼을 누른다. 그럼 희한하게도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가 온몸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거 말고, 내가 알아듣게 표현해 달라고. 내가 원하는 사랑을 달라고 그렇게 울부짖었지만 18년간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사니"라는 싸인을 남편은 18년 동안,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이효리와 이상순 부부가 떠오른다. 누구나 한량처럼 살면 서로 좋은 말이 오갈 수 있고, 여유롭게 살 수 있다던 이효리의 말이 생각난다. 내 남편도 이상순처럼 살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이효리가 아니어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나는 나와의 대화를 시작했는데, 18년간 그토록 어려웠던 남편의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을 더 많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란 환경, 표현하지 못하는 깊은 마음까지 읽게 되었다.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해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게 아니란 걸. 사랑이란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과정이란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6개월간 낯선 땅에서, 많은 것을 잃은 뒤에 얻은 선물 같은 깨달음이다.
나는 이제 여행의 진짜 의미를 안다.
여행이란,
여기에서 누리는
행복이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고,
'최악의 궁합'이라고 나온 나의 반쪽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다.
오래도록, 매일 여행하듯 살고싶다.
내남편 언어 번역기도 꼭 챙겨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