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루저 Jan 06. 2019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이퀄리즘'

한국 남자는 어떻게 평등을 말해야 할까요



몸에 타투가 여럿 있는데, 왼쪽 손목에는 평등(이퀄리티)을 상징하는 그래픽이 작게 그려져 있다.

|

나랑 한마디 말도 나눠보지 않은 누군가는 손가락질하며 그러더라. 이퀄리즘을 지향하는 거 아니냐고. 결국 너도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한남이었던 거냐고.

|

되묻고 싶다. 보편적인 가치의 ‘평등’(이퀄리티)과, 페미니즘의 타협을 유도하는 교묘한 태도로서 ‘평등주의’(이퀄리즘)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냐고 묻고 싶다.

|

대체 어떤 삐뚤어진 이미지 리터러시와 얄팍한 감수성을 갖고 있길래 ‘평등’이라는 의미의 그래픽 타투를 보면서 이퀄리즘과 연결시켜 ‘결국 저 놈도 페미니즘을 방해하는 한남’이라고 그토록 쉽게 수군댈 수 있는 것이냐고.

이퀄리즘과 페미니즘의 차이를 아는 자신이 너무나 대견해서, 평등이라는 심플한 그래픽조차 ‘이퀄리즘’으로 해석해 자신의 자부심 넘치는 ‘페미력’을 기어코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고.

|

어쨌든 답한다. 손목의 작은 문신 하나로 사상과 태도를 판단하는 그 게으르고 간편한 편견에 답하고, 결국 이 글도 조롱거리로 삼고 흐지부지 합리화를 하고 있을 그 모습들을 생각하며 답한다.

|

|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이퀄리즘을 반대할 때, 그 대상은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태도’라는 일반적 의미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양성평등’이라는 말로 ‘성평등’을 대체하고 자꾸 한국 사회에서 역차별을 들먹거리며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태도를 겨냥한 반대이다. 애초에 불평등하게 기울어진 사회와 그런 맥락에서 힘들게 싸워 온 페미니즘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 없이, ‘이퀄리즘’이라는 그럴싸하고 간편한 용어로 페미니즘을 쉽게 대체해버리려는 시도가 문제인 것이다.

|

평등주의(이퀄리즘)는 일반적인 의미로 ‘차별을 하지 않고 평등을 지향하는 태도’를 말하지만, 이건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전제가 성립될 때만 유효하다. 한 번도 남녀가 평등한 적 없었던 사회에서 성차별에 대한 태도로서의 이퀄리즘은 기만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 인권 운동이 양성‘평등주의’가 아닌 ‘여성주의’가 되어야 했던 건 당연했고, 여전히 가부장제가 공기처럼 퍼져있고 성차별에 관대한 사회라는 점에선 ‘이퀄리즘’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마땅하다.

|

그런데 문제는, ‘이퀄리즘’에 대한 페미니스트로서의 강박적인 비판이자 지나치게 일방적인 해석(이자 악의적인 오독)이다. 페미니즘을 교묘히 대체하는 이퀄리즘도 문제지만, 애초 평등주의의 본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안티-페미니즘’의 프레임으로만 흡수하는 것에도 동의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페미니즘/이퀄리즘의 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등장하는 평등과 차별 반대에 대한 목소리마저도 ‘이퀄리즘’이라 낙인찍고 안티-페미니즘의의 논리로 흡수시키면, 그 앞에선 평등에 대한 어떤 논의도 할 용의가 없어진다.

|

도리어 묻고 싶다. 내가 어떻게 말해야 당신의 그 강박적인 편견을 통과하며 ‘평등’의 의미가 왜곡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겠냐고. 어떤 방법으로 평등을 추구해야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강력히 표방하는 당신과 대화할 수 있는 거냐고. 혹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마저도 한국 사회에서 남자로 살고 있으면 입에 담거나 추구해선 안 되는 것이냐고.

|

그래서 답을 해줬으면 한다. 이 글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낄낄대는 식의 대충 눙치는 답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그간 나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말해 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답이었으면 한다. 대체 어떤 연유로 손목의 ‘평등’ 타투 하나로 인해, 나는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막고 ‘이퀄리즘’을 외치는 한남이 되어버린 거냐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