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을 나눠 짊어지지 않는 현대 종교의 이기주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아들아,
얼마 전, 무심코 구글링을 하다가 한 편의 논문 제목에 흥미를 느낀 적이 있었다.
'한국 영화에 나타난 기독교의 의미 양상 연구 -영화 <친절한 금자씨>와 <밀양>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Meaning and Aspect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Korean Movies - Focused on "Sympathy for Lady Vengeance" and "Secret Sunshine"'
- 조미영 (한국문학과종교학회 출간 문학과종교 제 16권 제 2호. 2011)
일반에 공유를 허락하지 않는 논문이라 세세히 내용을 들여다 보지 않았음에도 왜 이 논문이 위의 두 영화 <친절한 금자씨>와 <밀양>을 예로 들고 있는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지.
한 줄로 기독교와 두 영화가 연관된 주제의식을 표현해 보자면,
친절한 금자씨 - "너나 잘 하세요."
밀양 - 내가 널 용서하지 않았는데 넌 누구에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는거야?" 일게다.
친절한 금자씨의 영화 도입부에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주는 거라며 내미는 전도사의 두부 쟁반을 걷어 치우며 금자씨가 하는 말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현대의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 그 자체지.
밀양에서 자신의 딸을 유괴 살인한 죄인을 용서해 줄 맘으로 교도소를 찾은 주인공에게, 이미 자신은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니 당신의 용서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유괴범 때문에 주인공은 무너지고 신에게 도전하게 된다.
한국의 기독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딱 그러하다.
이기적이고 자기 아집에 빠진 종교의 모습이다.
너와 내가 믿는 종교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들아,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단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sympathy)의 영어 어원은 '함께 고통을 겪다'란 뜻에서 나왔다.
여기서 연대의식이 생기고 공감과 위로를 지나 구원에 이르는 종교의 기능이 발휘된다.
지난 역사 동안의 거의 모든 종교가 이 과정을 통해 교세를 늘려 왔다.
기독교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국의... 적어도 한국의 기독교는 변질되기 시작한다.
외관이 아니라 본질이 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 5:14-16]
세상의 빛이라 자부하는 교회는 자기들끼리 그 빛을 찬란하게 장식해 교회 안에 머물게만 했고,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지 않고 부대자루 안에서 썩어만 가고 있다.
자기끼리 우리끼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라 칭하며, 그들만의 친교 커뮤니티로 교회를 폐쇄시키고 있다.
장발장에게 은접시와 은촛대를 내주던 교회는 이제 훔쳐갈 것들이 넘쳐나 세콤으로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절박한 이의 기도를 위해 무릎 꿇을 예배당조차 쉽게 내어주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순교자들을 높이 기리는 이유는 스스로 고통의 자리, 죽음의 자리로 기꺼이 나아가는 종교적 신념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 감당한 순교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며 종교는 성장해 왔다.
고통을 나누는 삶, 그게 종교의 본질이자 미덕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는 그걸 반대로 가르쳤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게 아니라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걸 축복으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을 말이다.
교회를 다니면 안 아프게 되고, 교회를 다니면 자녀가 잘 되고, 교회를 다니면 대학을 잘 가고, 교회를 다니면 경제적 풍요는 누리게 된다고 말이다.
종교는 아픈 가운데서도 평안을 얻고, 자녀가 대학에 가지 못해도 화목함이 넘치고, 가난함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천국을 사는 그런 구원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들아, 명심하렴.
네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너의 선택이자 운명이다.
병을 얻든, 직장을 잃든, 시험에 떨어지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든, 경제적인 실패를 하든...
행여 그 모든 게 하나님이 너의 앞길을 막으신다며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거냐 원망하고픈 마음이 들거든, 그 때 이 아빠의 말을 떠올려라.
그건 모두 네 탓이다.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너를 아끼고 사랑하시므로 단지 그 사실에서 위로를 얻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아들아, 부디...
종교인이 되지 말고,
신앙인으로 살자.
건강한 신앙인이 살아 버티면,
그때야 비로소,
종교의 타락을 멈춰 세울 누군가가 나타날 희망을 비로소 갖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마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지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하지 마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몬테크리스토르.
#아들에게남기는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