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립군, 광해-왕이 된 남자, 남한산성, 올빼미로 보는 조선의 왕실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떠난 조선의 왕 선조.
아버지 대신 분조를 이끈 세자 광해는, 전쟁의 참화와 백성의 희생을 현장에서 목도한다.
영화 대립군은 군역을 피하고 싶은 돈 많은 이들을 대신해
전쟁에 나서는 서민(대립군)들과 왜란을 겪으며 성장하는 광해를 그린다.
권력자들이 버리고 떠난 전쟁의 현장에서 오롯이 그 참혹한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생생한 민낯을 목격한 광해는 이전 왕들이 막연한 이상으로 품던 진짜 '백성을 위한 정치'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지향하게 된다.
처참한 전쟁을 겪고 왕이 된 광해의 가장 큰 목표는, 밖으로는 대륙의 실세로 자리잡은 청과 양반체제 지배구조의 명분을 제공하던, 그러나 갈수록 쇠락하던 명 사이에서의 실리 중립 외교였다.
권력을 잡은 양반 세력들이 외치는 외교적 대의명분 때문에 승산없는 청과의 전쟁에 징집되어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조선의 죄없는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실제로 광해는 명의 요청으로 청과 싸우기 위해 출병하는 도원수 강홍립에게 "때를 보아 항복해서 필요없는 희생을 줄이라"는 밀지를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안으로는 왜란을 겪으며 목격한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대동법의 시행이 광해의 백성을 향한 정치적 목표었다.
왜란을 겪으며 현장에서 확인했던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개선 하는 일.
먹고 사는 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절박한 문제였던 백성들은 환영했고, 땅과 그 소산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던 양반들에게 대동법의 시행은 막아야 할 제도였고, 광해는 타도해야 할 군주가 되는 계기가 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에서 가짜 왕 하선을 분노하게 한 '농사꾼이 전복을 구해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공납제도의 폐해를 막고, 많은 농지를 가진 이는 많은 세금을 내고 적게 가진 이는 적게 내는 조세제도인 대동법을 결국 광해는 시행토록 한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자막인
'광해는 땅을 가진 이들에게만 조세를 부과하고,
제 백성을 살리려 명과 맞선 단 하나의 조선의 왕이다.'
라는 문장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청과의 실리 중립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가 반정으로 왕위에서 끌어내려지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다시 친명정책으로 회귀한다.
청은 이괄의 난을 구실로 병자년에 전쟁을 일으킨다.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하지만, 이미 대륙의 주인이 된 청의 위세 앞에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후 소현세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청에 볼모로 잡혀간다.
소설 원작에는 없지만 영화에서 창작된 캐릭터인 대장장이 서날쇠(고수)가 김상헌(김윤석)에게
"조선이 청나라를 섬기든 명나라를 섬기든 상관없다.
다만, 봄에 곡식을 뿌려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는 나라를 원할 뿐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은 친명이나 친청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조정과, 항복하면 왕위를 계속 보전받을 수 있을지를 묻는 인조의 관심과는 너무나 먼... 참혹한 현실에 발 딛고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슬픈 백성들의 부질 없는 희망처럼 들려 한 없이 서글펐다.
청에 머무르며 세상의 변화를 체감한 소현세자는 조선도 변해야 명처럼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신학문과 신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친명을 버리고 청과의 교류를 역설한다.
아버지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청을 배워야 할 나라로 말하는 소현세자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8년 간의 볼모 생활에서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를, 청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긴다.
결국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살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죽게 되고, 세자빈, 원손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세간에는 아버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돈다.
영화는 소현세자를 가까이서 치료하던 맹인침술사 경수(류준열)가
낮에는 안 보이나 밤에는 앞이 보이는 주맹증으로 인해 독살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실제 아버지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죽였는지의 여부는 학자들마다 여전히 논쟁이 많지만, 어쨌든 인조가 8년만에 볼모의 몸에서 조국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불안해 했던 지키고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인조가 불안해 하며 지키려 했던 왕위는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렇게 지켜진 왕위로 변하게 된 백성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헛된 명분보다 백성들의 소중한 생명과 삶이 더 중요한 것을 왜란의 현장에서 몸소 절감한 광해가 더 오래 왕위에서 실리외교와 선정을 펼쳤다면....
삼전도의 굴욕으로 강력한 나라 청의 위력을 체감한 인조가 그 대국의 위력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배우고 이를 우리 것으로 삼으려 노력했다면...
8년간의 심양 볼모 생활 중에 새로운 문물과 세상의 변화를 직접 보고 듣고 배운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라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개혁 왕정을 펼쳤다면 조선의 역사는 보다 긍정적이고 길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영화 올빼미에서 맹인침술사 경수(류준열)이 말한 것처럼 보아도 못 본 척 하고, 들어도 아니 들린 척 해야 하며, 알아도 모른 척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시대, 그저 그렇게 해야 끼니를 해결할 몫이 돌아오는 시대를 우리의 조상들은 어떻게 버텨왔는지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리고, 여전히 너희는 눈 가리고, 귀 닫고, 모른 척 하고 내가 말하는대로 내가 이끄는대로 전쟁터로 밀면 나가 싸우다 죽고, 세금을 더 내라면 빚을 내서라도 내라 독려하는 가진 자들의 위력이 여전히 존재함이 아프고 슬플 뿐.
영화 올빼미를 보고 나오며,
위의 네 영화 대립군, 광해-왕이 된 남자, 남한산성, 올빼미 속의 역사가 하나의 실로 엮여 주르르 머리 속에 흘러갔다.
아는 만큼, 기억나는 만큼 꿰어 여기에 적는다.
#대립군 #광해왕이된남자 #남한산성 #올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