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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테크리스토르 Apr 20. 2020

세대를 뛰어넘는 장대, 영화

- 아빠 어렸을 적 영화를 아이와 함께 봤다


"아, 재밌는데 졸리다..."


주말의 명화와 토요명화, 명화극장은 늘 아이들이 졸리기 시작하는 밤 시간에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하면 안방 불은 꺼졌고, 이불을 깔고 덮은 채로 영화를 보다 보면 어김없이 잠이 쏟아져 중요한 장면을 놓치기가 일쑤였다.

굳이 친절한 해설이 없어도, 영화나 배우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도 영화를 보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신발을 신은 채로 방을 드나드는 배우들의 모습과, 경찰이 아닌데도 총을 차고 다닐 수 있는 문화적 차이 따위는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종탑에 매달려 행복해하는 노틀담의 꼽추를 보며 뭉클해 하고,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와 상관없이 죽어가는 주인공을 보며 안타까와 했으며, 어쩌면 저리 대충 쏴도 악당들을 다 쓰러뜨릴 수 있는지 주인공의 총기 성능과 연사 실력에 대해 한 치의 의심 없이도 영화의 전개에 가슴 벅차 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봤던 그 시절의 영화의 스토리며 배우들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절의 거의 모든 영화들은 그렇게 감동이고 행복이었다.





걸작중의 걸작 벤허를 초딩시절에 입석으로 서서 한번, 중딩시절 단체관람 한번, 티비에선 여러번, 내 아이들과는 닳도록 함께 봤다. 4시간에 가까운 런닝타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연소자관람불가"

신문 하단의 눈길가는 영화 개봉작 포스터에는 어김없이 나이를 제한하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내 눈에 내 나이대가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영화는 왠지 시시하게만 보였다.

중학교에 가서는 중학생이상 관람가 영화가 성에 차지 않았고, 나는 어른들의 영화를 욕망하며 동시상영관에 숨어 들었었다.

영화는, 영화관은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로망과 도피처같은 곳이었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영화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떠들기 좋아하던 아이는 늘 대단한 어른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배우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워 할 때,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필모그래피를 읊어대던 한 친구는 대단한 영화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추켜 올려졌고, 영화의 OST 정도를 흥얼거려주는 또 다른 친구 하나는 꽤나 수준있는 문화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모두에게 노출되는 개봉작 정보들이야 대부분의 아이들도 입에 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정보들이었지만, '아, 그 영화 명작이지...' 또는 '그 배우는 그 영화 말고 이 영화에서 진짜 죽여주는 연기를 했어...' 따위의 자랑을 펼쳐 보이기 위해 영화잡지를 뒤적이고,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를 듣기 위해 헤드폰을 뒤집어 쓰는 밤이 이어졌다.

덕분에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옛날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아이로 살게 되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들보다 '조금 더 감성적인'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게 영화는,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좋은 학교이자 타임머신이었다.




TV에서 보던 영웅을 공개방송에서 보는 시절이라니... 나는 어느덧 번개맨 등장송을 함께 따라부르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개봉 영화를 고를 때,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연소자관람가' 영화가 최우선이 되고,

TV 프로그램도 마음대로 선택할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달려라 번개호>, <독수리 5형제>  이후에 이별했던 어린이 프로그램이 나의 저녁 시간과 주말을 채우기 시작했다.

얼결에 토마스 기차와 친구가 되었고, 뜬금 없는 스토리 전개와 웃음의 타이밍을 도무지 맞추기 힘든 스폰지밥을 보며 따하하하하  따하하하 하고 웃는 버릇이 생겼다.

아이가 어느 정도 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무렵이 되자, 뭔가 방도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즐거울 수 있는 컨텐츠를 찾아 보자.

그런 즈음에 라디오 음악프로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한 문장에 머릿 속이 번쩍했다.

"Oldies But Goodies"

오래되었지만 좋은 것, 

시대를 막론하고 그 가치와 감동을 인정받는 작품을 고전이라 부르는데, 명작은 수십 수백 수천년의 시간 차를 두고도 그 감동이 공유된다는 사실!

그래, 내가 어릴 적 재밌게 봤던 영화들을 아이들과 함께 다시 보자.

내가 주말의영화, 토요명화, 명화극장에서 부모님과 같이 보던 내 앞시대의 영화들을 통해서도 감동과 재미를 느꼈듯이, 내 아이들도 내가 어릴 때 봤던 영화들에 공감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명작이, 걸작이 ,대작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나조차도 기억이 희미한 영화들이 많아서 보는 동안 내 자신도 집중할 수 있었고, 의외로 예전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와 내가 더 벅차하며 봤던 영화도 많았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성룡을 소개하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찰리 채플린을 소개하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폴 뉴먼과 더스틴 호프먼을 소개했었다.

아이들은 영화를 통해서 죽음을 배우기도 했다. 

"아빠, 로빈 윌리엄스가 자살했대요."

언제나 행복한 미소로 타인을 위로해주고만 살 것 같았던 로빈 윌리엄스의 부고를 전해 준 건 초등학생이던 내 큰 아이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후크>, <미세스다웃파이어>, <쥬만지>, <잭>, <플러버>, <굿윌헌팅>, <패치아담스>, <바이센테니얼맨>, <박물관이 살아있다> 까지 아이들에게 로빈 윌리엄스는 가장 사랑하는 배우이자 늘 닮고 싶은 어른이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아이들은 무척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영화를 통해 성장해갔다.





'즐겁다' 가 반복되는 일상이 되면 '행복하다'가 넘치는 가정을 만들 수 있다. 놀랍게도...  많이 어렵지 않다.


"너에게 아빠는 어떤 분이니?"

"음... 저에게 영화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신 분?"

이제 고2가 된 큰 아이가 엄마와 나눴다는 대화 내용이다.

보람됐다.

내 아이가 아빠와 함께 봤던 영화의 기억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 시간의 유산을 물려준 아빠로서는 더없는 보람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큰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시작한 아빠와 함께 옛날 영화 보기.

영화 보는 눈이 뜨였다고 자부하시는 큰 아이는 이제 벌써 아빠에게 작아진 바지를 물려주는 덩치의 고딩이가 되었다.

몇 번을 날려 먹은 후에 남아 있는 컴퓨터 외장하드에는 함께 본 영화 폴더와 아직 안 본 영화 폴더가 나뉘어져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 날려 먹은 두 개의 외장하드를 가득 채웠던 영화들을 제외하고도, 현재의 외장하드엔 300여 편이 넘는 영화가 함께 본 영화 폴더에 담겨져 있다. 


주말이 올 때마다 아이들은 먼저 물어왔다.

"아빠, 이번주엔 무슨 영화 봐요?"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가 무궁무진 넘쳐 나서 난 늘 즐겁고 행복한 주말이 기다려졌다.

아이에게 물려준 영화의 추억,

아이가 기꺼이 함께 해 준 아빠와의 추억의 시간들...

그 작지만 소소한 추억의 단상들이 영화를 통해 쌓여간다.

영화의 줄거리나 내용이나 감동이나 연기/연출의 걸출함에 대한 평가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나누고픈 각자 나름대로의 감상들을 팝콘 집어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듯 남겨보는 즐거움이 나의 집 거실에 있다.





폴란드의 

제이콥의 거짓말 (1999) Jakob the Liar



며칠 전, 

한참을 벼르고 묵혀두었던 옛날 영화,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1999년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 Jakob the Liar>을 보고 있는데,

화장실 다녀 오느라 내 뒤를 슥 지나던 큰 아이가 아는 체를 한다.

"어, 저거 그거죠... 그 거짓말... 유태인 수용소..."

"어, 맞아...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요. 유명하더라구요 저 영화,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던데..."

아이들은 어느새, 

내 추천 없이도 좋은 영화 한 편씩을 자신들의 인생에 쌓아가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과 대화할 꺼리, 공통의 화제꺼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이 각박한 세대격차의 시대에

영화는 가족을 연결해 줄 좋은 끈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장대가 되어준다. 

이번 주말, 엄마, 아빠의 어린시절 감동을 안겼던 영화 한 편을 준비해 아이들과 거실에 앉아 보시라.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이 거실 티비 앞 소파 앞에서 팝콘처럼 튀어오를 것이다.


레디,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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