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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Nov 13. 2021

니고데모: 예수를 변호한 자

예수가 씌워준 니고데모의 안경 이야기

I. 들어가며

1. 예수를 증거 하는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이 존재하지만, 좋은 답변 중 하나는 바로 '증인(witness)'이라는 답이다.  증인의 역할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를 증언하는 역할을 맡은 '증인'이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며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을 당부했다.  예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증인이고, 또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럼 여기서 한번 일반론을 생각해보자, 증인은 어떻게 증언을 해야 하는가?  증인의 임무이자 목적은 변호사, 검사, 판사가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질문에 대해 성실히 대답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의 증인 된 삶이란 이처럼 누군가가 예수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2. "니고데모가 뭐예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께서 만약 그리스도인이시라면, 본인에게 한번 위 질문을 던져보시길 권유드린다.  예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에 대해서 질문하였을 때 나는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성경에서 가지는 비중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니고데모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결코 쉽고 만만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이러한 증인석에 앉게 될 때가 생긴다는 것이다.  얼마전 화창한 날 오후즈음 내게도 그 증인석에 앉을 기회가 찾아왔다.


  "니고데모가 뭐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맞닥뜨렸다.  이야기는 재밌게도 로스쿨 동아리 이름에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다니는 로스쿨의 동아리 이름은 굉장히 재치 있게 만들어져 있는데, 배드민턴 동아리는 '배드민법', 등산 동아리는 '산으LAW', 농구 동아리는 '프리드LAW'와 같은 식으로 재치 있는 작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기독교 동아리이자 신우회의 이름은 그런 재치있는 이름이 아닌 '니고데모'이다.  그래서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아는 한 친구가 니고데모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잠시 니고데모가 성경에 나왔던 부분들을 되짚어봤다.  밤늦게 예수에게 진리를 찾으러 왔던 장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변호했던 장면, 예수의 장례를 치렀던 장면 등등...


  "응 예수에게 찾아와 질문을 던졌던 율법학자야"로 시작된 나의 답변은 어느새 니고데모에게 향했던 예수의 답변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성경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니고데모를 향한 예수의 답변을 설명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핵심 내용은 '거듭남'인데 이 거듭남의 개념을 일상의 단어로 설명하기란 굉장히 어려울뿐더러 거듭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예수의 설명이 갖는 깊이가 엄청나게 깊기 때문이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서는 전 세계 크리스찬이라면 그 누구나 모두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바로 그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구절 하나에 내포하고 있는 이 구절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예수는 결국 불공정한 재판을 받아 죽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형사소송법적 변호를 했던 사람이야."  일상 대화에서 나온 주제였기에 서둘러 니고데모가 예수를 변호했던 이야기로 짧은 답변을 마무리했지만,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지 못해 마음 한편에 아쉬움이 남았다.  니고데모에 대해 설명을 시도해보면서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니고데모에 대한 설명은 성경과 예수에 대한 핵심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알았다.  그래서 이 글은 니고데모에 대한 글이자, 니고데모를 설명하며 성경과 예수를 설명하는 글이다.  니고데모가 누구냐는 대답에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우셨다면 잠시 이 글을 저와 함께 읽어보시길 권유드린다.  제가 그랬듯 내일 누군가로부터 "니고데모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을 받게 되실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John La Farge, Visit of Nicodemus to Christ, 1880, oil on canvas


II. 성경 속 니고데모 이야기

1. 늦은 밤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요한복음3:1-21)

1) 니고데모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요한복음3:1-3)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지도계층, 바리새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자 랍비(선생님)였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를 "랍비"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불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선생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와 대척 중인 지도계층이자 바리새인이며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를 찾는다.


  예수를 만나서 니고데모는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이를 '질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질문이 아니다.  예수에게 당신이 행하는 일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며, 당신은 하나님이 보낸 선생이라 말했을 뿐이다.  그러자 예수는 맥락상 조금은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한밤중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굳이 직접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있었던 풀리지 않는 질문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의 마음속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라는 기독교의 중심을 정확하게 찌르는 질문이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3:1-3)


2)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요한복음3:4-15)

  니고데모가 되묻는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명료하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즉, 우리가 모두 다 일듯 '세례'를 받음으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어려운 대답에 니고데모의 질문이 이어지고, 예수의 대답이 그 뒤를 따른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4-15)


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3:16-21)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사랑했다는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터뜨린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마치 끝까지 가서 바닥이 다 드러난 남녀의 싸움에서 나올법한 불만이다.  이에 대해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답변하지 않으시나, 오랜 시간이 흘러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신다.  '어떻게' 사랑하셨느냐에 대한 물음에 '이처럼' 사랑했다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성경의 핵심을 담은 구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6-21)


4) 소결: 거듭남의 의미

  예수는 니고데모의 한밤중 방문을 맞아 그 속에 있던 궁금증을 꽤나 긴 이야기로 해결해준다.  모든 사람이 마음 한편에 가지는 질문인 '진리(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었다.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 담고 있는 심오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의 핵심은 '거듭남(born again)'이었다.  예수가 말한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의미의 '세례'와 연결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이는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된다.  세례를 설명하자면 세례 요한의 세례부터 시작해 바울의 세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글 하나에 할애해야 할 것 같아 여기서는 아주 간단한 설명과 세례의 깊은 의미를 잘 담아낸 몇 개의 신약 말씀을 인용하며 설명을 갈음하려고 한다.


  세례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죄를 진 죄인은 원래 자신의 생명으로 죗값을 치뤄야 하는데, 성경의 핵심은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마땅히 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인간 대신해 죽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통해 내 자신이  이상 스스로의 죄에 구속되지 않는 방법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며,  시작이 바로 세례라고   있다.  세례는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세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내가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을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와 같이 죽는다"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하곤 한.  결국 세례는 성경이 말하는 핵심 내용을 '표상'하는 매개체라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거듭남의 의미가 아닐까?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   있다고 말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4)


2. 예수를 변호한 유일한 사람(요7:50-52)

  예수를 찾아와 진리를 배웠던 니고데모는 한참 시간이 지나 성경에 재등장한다.  예수를 잡아오라고(체포) 아랫사람들을 보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아랫사람들이 잡아올 이유가 없다며 그냥 돌아오자 못마땅해한다.  그 장면에서 니고데모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의 편에서 변호를 시작한다.  율법상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확인을 해보지도 않은 채, 들리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판결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이러한 주장은 현대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는 적법절차의 원칙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근거로 하는 변론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엄밀히 따지면 체포의 요건인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제1항 전문)' 또는 '체포적부심사'를 근거로 예수를 향한 체포 시도의 부당함에 대해 변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7:50-52)


3. 예수의 장례를 돕다(요19:39-40)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의 장례를 도와 마지막을 함께한다.  처음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등장했던 니고데모의 모습과는 새삼 다른 모습이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39-40)
Henry Ossawa Tanner, Study for Christ and Nicodemus on a Rooftop, ca. 1923, oil on wood panel


III. 나오며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니고데모에 대해서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던 때는 대학에 가서 『니고데모의 안경』이라는 기독교 세계관 책을 접했을 때였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이자, 지도층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성서학 박사이자 신학 박사 학위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이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청년 예수를 만나고 '진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어 변화된 것을 '안경'을 쓰는 것으로 표현했던 이 책을 통해 나는 니고데모를 재조명하게 되었다.

니고데모는 안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원했다면 말이다. 그것을 모른 채 그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식인 소리를 들었을 그가 다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대화는 동문서답으로 헛돌다 끝난 것처럼 보인다 ...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안목을 거듭나게 하는 복음의 안경이었다. 훗날 예수님의 주검에 향품을 바르러 온 니고데모는 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신국원, 『니고데모의 안경』, IVP, 2005, 13면.


  사실 니고데모는 성경에서 그리 큰 비중을 가진 인물이 아니다.  외경(성경으로 공인된 66권 이외의 책)에는 니고데모가 작성한 니고데모 복음서가 존재할 정도로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 66권에서 니고데모는 앞서 살펴보았던 요한복음의 3가지 장면에서만 등장하며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이유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나오는 예수의 답변이 가진 깊이와 함께, 그 깊은 답변을 이해하고 짧은 대화를 통해 니고데모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새롭게 된 니고데모의 모습을 성경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밤늦게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바리새인과 공회원들 앞에서 예수를 변호하는 자가 되었다.  그를 바뀌게 했던 예수의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를 바꾸기에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도 예수께서 씌워주신 니고데모의 안경을 쓸 시간이다.  그 안경을 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 되어 있을까?  나아가 그 안경을 쓰고 바라본 세상은 어떠한 모습일까?






<커버 사진>

Henry Ossawa Tanner, Study for Christ and Nicodemus on a Rooftop, ca. 1923, oil on wood panel,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Gift of Mr. and Mrs. Norman Robbins, 1983.95.1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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