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석 May 25. 2020

어디서 여자가 감히

전합2002다1178: 종중회원확인 판례로 보는 관습법이 사라지는 과정

I. 들어가며

어렸을 때엔 1년 중 손 모아 기다리게 되는 날들이 여러 번 있었다.  친구들을 불러서 맛있는 것을 먹는 생일파티가 있는 생일이 그러했고, 아침 일찍부터 평소 보고 싶었던 만화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어린이날이 그러했다.  그리고, 가장 기대되는 날 중에 하나는 세뱃돈을 받을 수 있는 설날이었다.  설날 전날 밤만 되면, 내일 얼마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어 밤잠을 설치곤 했을 정도였다.


우리 집은 거리가 조금 더 먼 친가를 먼저 가고, 집과 가까운 외가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외가에서는 누구나 같은 액수의 세뱃돈을 받았는데, 친가에서는 그렇지 않았었다.  바로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며, 아들에게는 2배 더 많은 돈을 항상 챙겨주시곤 하셨다.  친가에 오는 친척들 중에서 나만 유일하게 아들이었는데, 그래서 세배를 하고 나면 내 손에는 다른 자매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가 들려있었다.  그래서 세배가 끝난 후 늘 뛰어갔던 슈퍼마켓에서 과자를 살 때에는 내가 조금 더 돈을 냈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도 내가 대를 이을 남자라며 특별 대우를 해주거나 더 많은 세뱃돈을 챙겨주지 않으신다.  예전에는 친가에서의 그런 특별 대우가 당연한 것이었는데, 더 이상 그러한 대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의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은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존재라는 생각이 여러 가지 경로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교육의 힘을 이야기할 것이고,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의 힘을 이야기할 것이다.  글쎄, 물론 그러한 노력들이 당연히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거 같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정말 결정적이었던 것은 무엇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혁명론』에서 "성공한 혁명은 반드시 법을 바꾸는 형태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론에 따르면, 분명 이러한 혁명적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법이 바뀌는 순간부터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나라는 세계 그 어떤 나라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나라를 시작하면서 개헌헌법에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는 투표권을 규정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평등성'을 규정했던 나라다.  유럽도 미국도 그렇게 하지 못했었고, 이 법은 나라가 만들어진 이래로 바뀐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한 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바뀌었던 것일까?


II. 관습법은 사라질 수 있는가

1. 법원(法原)

제1조(법원) 민사에 관하여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

민법을 공부하면 가장 첫 번째 배우는 것이 법원(法原)이다.  아니 재판을 하는 법원은 당연히 알겠는데, 한자가 그 한자가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바로 법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 민법은 제1조에서 법률, 관습법, 조리를 순서대로 법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판례가 법원으로 인정되는 영미법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2. 관습법

문제가 있을만한 부분은 바로 오늘 이야기할 '관습법'이다.  법전에 쓰여있는 법을 중심으로 법을 구성하는 우리나라의 성문법 체계에서 쓰여있지 않은 관습법을 법으로 인정하는데 과연 그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관습이 바뀌면 기존의 관습법은 폐지되는지 등의 것들이 문제 된다.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마치 "관습법이란 이런 거야~"라며 그러한 논쟁과 논란들을 일축시켰다.  정리해보면, 관습이 법으로 되기 위해서는 (1) 관행(반복성), (2) 관행을 법규범으로 인식하는 법적 확신, (3)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전체 법질서에 반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대판 2005.7.21, 전합 2002다1178
관습법이란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한 사회생활규범이 사회의 법적 확신과 인식에 의하여 법적 규범으로 승인·강행되기에 이른 것을 말하고, 그러한 관습법은 법원(法源)으로서 법령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법칙으로서의 효력이 있는 것이고, 또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한 어떤 사회생활규범이 법적 규범으로 승인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기 위하여는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전체 법질서에 반하지 아니하는 것으로서 정당성과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지 아니한 사회생활규범은 비록 그것이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법적 규범으로 삼아 관습법으로서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사회에서 가장 핫이슈 중 하나였던 '세상이 변했을 때, 기존의 관습법은 폐지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내놓았다.  (1) 사회구성원들이 관행의 법적 구속력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않게 되었거나, (2)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적 이념이나 사회질서의 변화로 관습법이 전체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게 된 경우 관습법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판 2005.7.21. 전합2002다1178
사회의 거듭된 관행으로 생성된 사회생활규범이 관습법으로 승인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관행의 법적 구속력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않게 되었다거나,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적 이념이나 사회질서의 변화로 인하여 그러한 관습법을 적용하여야 할 시점에 있어서의 전체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러한 관습법은 법적 규범으로서의 효력이 부정될 수밖에 없다.


3. 남녀평등을 외친 판례 2002다1178

앞서 두 번 인용한 2002다1178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관습법에 관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서도 굉장한 판례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남녀평등'을 실체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외친 판례라는 점에서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  이 판례의 명칭이 바로 '출가여성의 종중원 지위인정 판결'인 까닭이 바로 그곳에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이 외쳤던 '남녀평등'이라는 구호가, 대법원의 판사 전원에 의해서 외쳐질 때 비로소 사회는 변화되었다.  아마 그것이 우리 사법부 60년의 역사 속에서 사회를 바꾼 판결을 꼽으라 할 때 이 판결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같이 판례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I. 출가여성의 종중원 지위인정 판결: 대판 2005.7.21, 전합 2002다1178

1. 배경

대한민국에서 남녀의 차별은 불법이면서도 합법이었다.  잘못 읽으신 것이 아니다.  헌법에서는 제11조 1항과 제36조 1항에서 남녀평등을 일찍이 규정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만들어지면서 남녀평등을 외쳤던 세계에 몇 안 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부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반드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36조 ①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그러나, 관습법에서는 분명히 남녀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유교문화가 익숙했던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관습법의 적용이 더 두드러지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2. 내용

판결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인이씨사맹공파 출가여성 5명과 청송심씨혜령공파 출가여성 3명이 종중을 상대 소송을 한 것이다.  소송의 내용은 무엇이었냐면, 같은 집안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중(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이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땅의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서 땅을 판매한 뒤 종중의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그때, 문제가 된 것은 관습법으로 종중은 오직 같은 집안의 '남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규정되어 있었던 점이다.  그래서, 여성 종원은 소송을 냈다.  자신도 종원의 한 구성원으로서 땅을 판 돈을 분배받고 싶다고 말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중회원확인소송 상고심에서 대법관 전원일치로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며 종원의 자격을 성년남자로 제한했던 종래 관습법의 법적효력을 부정하고, 여성도 성년이 되면 당연히 종중회원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을 통해 여성들도 종중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됐으며, 종중재산도 남성들과 함께 분배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아래 많은 여성 종중원분들이 활짝 웃고 계신 것이다.  당시 뉴스 자료를 보면, 판결이 나자마자 저분들 중 일부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법원을 나가는 모습이 나온다.  얼마나 기쁘셨을까?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15


3. 분석

이 판결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선, 앞서 이야기한 '관습법'과 관련한 내용 정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관습법을 재판부가 직권으로 없앤 것이다.  이는 생각보다 충격적인 일이다.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에서는 결코 재판부에게 법을 만들고 없앨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례는 "종원의 자격을 성년 남자로만 제한하는 종래 관습은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법적 확신은 상당 부분 흔들리거나 약화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헌법상 남녀평등의 원칙(헌법 제11조 1항, 제36조 1항)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변화된 우리의 전체 법질서에 부합하지 아니하여 정당성과 합리성이 있다고 할 수 없어 더 이상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종중이란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조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이므로, 종중의 이러한 목적과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공동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하는 후손은 성별의 구별 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된다고 보는 것이 조리에 합당하다"고 판시하며 판결이 나오게 된 경위와 사유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대판 2005.7.21, 전합2002다1178)


그런데 여기 한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있다.  '모든 단체에서는 반드시 남녀의 가입을 모두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것이다.  우리 대법원은 종중의 자연발생성에 주목했다.  선택적으로 만들어지는 단체에는 이러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단체에는 그 구성원도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이 조리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농구를 좋아하는 남성들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성의 가입 요청을 불허하는 것은 완전한 합법이다.


4. 검토

종래 관습법은 여성을 차별하는 가부장적 제도이므로 헌법 제11조 및 제36조 1항에 반하는 것이다.  호주제의 경우 남녀차별을 이유로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던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판례의 입장은 타당하다고 보인다.


많은 학자들을 비롯하여, 법조인들은 이 판결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의 최대 사건으로 이 판결을 꼽는 신문들도 많았고, 사법부도 수십 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이 판결을 대표적인 판결 중 하나로 선정했다.  많은 법학자들 및 일반인들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 판결에 대해 이야기를 진행했다.


종중처럼 자연발생적으로 구성원이 결정되는 경우이든, 구성원을 정하는 데 자율성을 가지는 사적 단체이든, 학교법인처럼 공공성을 띤 단체이든 구성원에 대한 차별처우가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법감정에 비추어볼 때 도저히 용인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경우에는 위법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용인의 한계를 벗어낫는지는 사적 단체의 성격이나 목적, 차별 처우의 필요성, 차별 처우에 의한 법익 침해의 양상 및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  결국 단체의 성격이나 목적 등에 따라 사적 자치를 제한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으나 그 기 본에는 헌법 원칙이 놓여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영란, 판결과 정의: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사적 단체에 적용되는 헌법의 범위 중


IV. 나오며: "어디서 여자가 감히"

과거 내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많은 미디어에서 이러한 문구가 많이 나왔다.  "어디서 여자가 감히"라는 말이다.  당시에도 이 말은 과거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아집을 비꼬는 형태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러한 문구 또는 비슷한 뉘앙스의 말들을 쉽게 이야기했었다.


여성은 그동안 제사에서 철저하게 도구의 영역에 놓였을 뿐, 주재자로 자리하지는 못했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제사상 앞에서의 이러한 구도는 나라가 보장하는 '합법적인 차별'이었어며, 지금도 이러한 차별은 곳곳에서 답습되고 있다.

이선민, 여자의집II, 이순자의 집#1-제사풍경, 2004.


출가여성의 종중원 지위인정 판결이 나온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2005년의 사회 풍경과, 2020년의 사회 풍경은 너무나도 달라졌다.  오늘날 누군가가 "어디서 여자가 감히"라는 문장을 사용했다고 상상해보자.  어떤 일이 발생할까?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경멸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것이다.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유지되었던 관습은 이렇게 급속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법', 다시 말해 '판결'을 통해 바뀔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0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면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엄청나게 강력했다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외치는 소리보다, 대법원 판사들의 한 번의 목소리가 사회에는 더 크게 들렸다는 것이다.  물론 수백만, 수천만의 목소리가 사회의 관습을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사법부의 외침으로 세상은 현저히 변했다.  "땅땅땅" 판사의 손에 들린 망치가 가지고 있는 힘은 얼마나 강력하단 말인가!





(커버사진 출처: https://theconversation.com/men-are-from-mars-women-are-from-mars-how-people-choose-partners-is-surprisingly-similar-but-depends-on-age-161081)



매거진의 이전글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