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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Sep 10. 2020

아무 것도 끝내지 못하는 세계관의 자기변명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이 문장은 발화자의 의향이 다소 강조되었지만, 핵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끝낸 것이 아니다. 끝나는 것, 끝내야 하는 것에 대해 그저 골몰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이 영화의 제목이 되었기 때문에, ‘질문은 하나다.’ 문장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끝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한 남성이 있다. 두려움 속에서 단 한 가지 질문만을 마주해야 하는 그의 말이기도 한 영화의 제목은 곧, 그가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종언을 바라는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영화 곳곳에서 의도적으로 논의되는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인식, 과거에 대한 기이한 향수에 사로잡힌 어긋난 집착들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를 굳이 보아야 한다면, 당연히 남성들이 보아야 하는 영화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를 어떻게 보든 간에(시간과 노화에 대한 풍성한 성찰로 읽더라도), 이 거대한 자의식-세계관 앞에서 관객은 불편 불쾌할 수밖에 없다. 루시아의 입을 빌려 제이크는 말한다. 스펙타클은 시각적 속임수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구현된 세계관이라고(물론 그것은 애초에 기 드보르의 말이지만, 앞서 제이크는 인용이 곧 개인의 관점, 삶인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끝내야 하는 것은 삶이자 세계이자 세계관이며, 그것을 끝내야 한다고 ‘주창’하는 목소리 역시 그 세계관이다. 세계관은 자신을 끝낼 수 있는가? 나아가, 나는 나를 끝낼 수 있는가?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제기되는 전제, 제이크의 세계가 곧 제이크의 관념이라는 점으로부터 촉발되는 질문이자, 명백하게 관객에게 주어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주목할 때, <영향 아래 있는 여자>라는 영화에 대한 루시아-제이크의 말들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스스로에 대한 지적이자 변명으로 보인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루시아 : 멍청한 상징만으로도 야유 받을 만하지만, 2시간 35분 동안 진이 빠져서 나오는 건  한탄뿐이지. 메이블을 둘러싼 인물들의 병리학적 성격을 확립해서 고립감을 보여주기  위한 세부사항들은 오히려 삐걱거리고 거짓된 순간들이 돼. 등장인물들이 모르는 건지,  카사베티스가 모르고 찍은 건지 애매하다니까. 애들은 계속 엄마를 사랑한다고 중얼거려. 그 상투적인 말들을 해독할 단서가 없어. 애들이 엄마의 응석을 받아주나?  역할을 바꿔서 엄마를 아이처럼 대하고 안심시켜? 엄마만큼 부끄러움 없이 사랑해주나? 닉의 끊임없는 주창을 어떻게 이해해야 돼? …(중략)… 이 영화는 완전히 편향적이야. 깊이 있는 고민이라고는 없어.

제이크 : 난 그냥 현혹된 것 같아. 카사베티스가 메이블한테 보여준 연민에 말이야. 우리 사회엔 그런 친절이 결여돼 있는 것 같아. 타인이 발버둥 칠 때 이해하려는 의지 같은 것도. 그들이 발버둥 치는 이유는…

루시아 : 사회가 소외시켜서다?

제이크 : 글쎄… 아마도? 응, 절망적인 것 같아.

루시아 : 뭐가?

제이크 : 전부, 모든 게. (그리고 노화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알레고리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영화는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미리 평가함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려 했다. 이어지는 제이크의 말은 흥미롭다. 그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한다. 아니 대변하는 척한다. 그는 현혹되는 관객이 되어서 영화 밖의 관객들이 자신의 발버둥을 공감하도록 요청한다. 하지만 이토록 의도적으로 상정된 자리에 우리는 앉아야 하는 걸까. 영화 안의 세계는 곧 제이크의 세계이자 제이크의 관념이다. 그런데 영화가 스스로 안과 밖을 뒤섞으려 한다면, 제이크의 세계는 처음부터 영화 밖에서 구현된 것이다. 루이사가 화면 밖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 초반의 장면은 그제야 뒤늦게 우리에게 일종의 구조 신호로 수신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회한과 자조, 반성을 통해 화려하게 치장한 거대한 자살 선언이다. 나는 자살을 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주목하라. 나는 세계를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이 선언의 내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제이크는 징징대고 있을 따름이다. 영화의 마지막, 정체모를 상을 받으러 올라간 제이크는 허깨비와 같은 세계를 탈출하겠다는 자기고백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이 노래는 내가 꿈꾼 여자가 아니라, 정말로 나만의 것이 될 여자를 찾아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아, 진실한 사랑! 끝까지 나만을 사랑해 줄 한 여자를 욕망하는 이 자의식으로는, 끝나는 것ending things에 대해 아무리 생각한들 스스로를 끝낼 수 없다. 영화는 그 점을 보여주면서, 실천하지 못한 채 생각만 하고 있는thinking of 거대한 비계 덩어리의 머릿속을 투명하게 열어둔다. 자살은 실패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을 한 자도 안 읽어도 그가 자살한 사실은 모두가 안다. 제이크는 그것을 역겨워한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 못한다. 박수를 치는 영화 안의 관객들과 달리 영화 밖의 관객들은 조소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관람을 ‘끝낼’ 수는 없다. 제이크의 세계관은 영화 밖에서 구현된 세계관이다. 따라서 제이크의 실패를 비웃으며 자리를 떠날 때 관객이 앉았던 자리는 영화가 상정한 자리일 뿐이다. 영화 초반에 차에서 오간 대화를 미루어보면 제이크에게는 공동체를 위해 자살하려는 목적 같은 것이 없다. 어쩌면 그가 복수plural로서 일종의 공동체인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일부가 끝나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때의 자살도 결국 자신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이 살기 위함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프로그램된 존재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비관한다. 그는 남아 있으려 한다. 안전하고 조용하고 평온한 곳, 자신의 학교에. 밤새 폭설이 내리고 차와 길이 눈으로 뒤덮이는 동안 꿈에서 깨어야 한다고 ‘생각’(만)하다가, 아침이면 눈을 쓸고 혼자만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제이크-돼지는 인식론적 성찰에 도달하는 걸까? 너, 나, 아이디어는 모두 하나라는 말을 통해서? 아니다. 이 자기 위무를 위한 대상화는 어디에도 제대로 함께하지 못한 우울한 삶을 합리화한다. 시간이란 허구적 관념이다.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지해 있고 시간이 우리를 통과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과거도 다른 인물의 삶도 모두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것이라고, 제이크는, 아니 영화는 판단하는 듯하다. 그래서 제이크에게는 외부가 없다. 자신의 끝조차 자신의 관념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외부를 부단히 의식한 이 영화가 그를 철저하게 그렇게 만들었다.


영화는 왜 그에게 방황하는 유대인처럼 스스로 끝낼 수 없는 저주를 내렸는가. 자신이 스스로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와 제이크의 세계관을 분리할 수 없으므로, 영화의 스펙타클에 속지 말아야 한다. 자살 선언으로 돌아가서, 영화는 자살을 하겠다고 관객을 불러 모은 뒤 제이크의 세계를 쇼처럼 보여준다. 이 한심한 남자를 보아라. 그는 얼마나 비참한가. 그렇게 제이크의 세계를 영화 안팎으로 전시하여 자신의 알리바이를 마련함과 동시에 일종의 대리보충 삼아, 영화는 그것이 제이크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임을 교묘하게 감춘 채, 회개기도로 죄를 씻은 사람처럼 자유로워지려 한다.


질문은 하나다. 나는 나를 끝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역시, 결국엔 하나로 수렴한다.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이 문장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지난날을 다양한 초점에서 회고하는 붕괴된 정신의 소유자 제이크는, 그의 부모이자 루이사이기도 한 영화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정말로 ‘여성혐오적이고 프로이트적인 개소리’를 늘어놓았던 영화 밖의 붕괴된 정신은 아무 것도 끝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을 웅얼거리며, 골몰하는 똑똑한 남자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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