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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Feb 20. 2021

이곳에서 사는 동안

─ 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며칠 전 사진 액자가 함께 오는 비비안 마이어의 포스터 북을 결제했다.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몇 달 동안 생각해오던 문제에 대한 일종의 실천이기도 했다. 바닥에 쌓인 책더미와 잡동사니들, 행거에 겹겹이 걸친 옷가지, 달리 보관할 곳이 없는 선풍기, 여러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이사 초기에 샀으나 은근슬쩍 책 선반이 된 스툴. 방은 쓰레기장 같기도 하고, 나의 계급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손쓸 수 없는 남루한 안식처 같기도 하다. ‘내가 지낸 곳들은 집이 아니었다. 나는 방에 살았다.’(54쪽)는 문장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방에 살고 있는 까닭이다.


고시원으로 등록된 건물에 살게 되면서 원룸도, 고시원도, 근생도 그 이름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나뉘는지 전보다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건물을 부동산에서는 ‘원룸텔’이라고 불렀다. 세탁기와 화장실이 방마다 딸려 있었지만, 화장실이 유리 부스로 처리된 방은 처음 봤다. 거주 초반에는 화장실을 사용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장실 유리를 비롯해 수납장 문마다 붙어 있는 꽃무늬는 정리와는 별개로 이 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했다. 지금은 익숙해져 평소에는 꽃무늬가 아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엽서나 포스터, 시가 인쇄된 A4 용지를 수납장 문이나 벽에 붙였다 뗐다 했다. 어떻게 해도 난잡해지기만 할 뿐 방은 더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싸구려 벽지를 감추기 위해 벽에 사진과 그림을 붙였다. 에곤 실레의 화집에서 오려낸 그림들은 침대 옆에, 사진집에서 잘라낸 작가의 사진들은 책상 앞에 붙였다. 쑥스럽지만 내 방이 작가의 방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진짜’ 작가라면 다른 작가의 사진을 붙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74-75쪽)


머무는 공간으로 그 사람의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간은 적어도 그 사람의 일부를 대변한다. 책과 물건이 새로 쌓이기 시작하자, 금세 방은 누울 자리만 남았다. 주변을 매일 쓸어도 나머지 구석은 먼지가 새카맣게 쌓였다. 책먼지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털 자리도, 베란다나 현관 앞의 여유 공간도 없고, 해도 들지 않는 조건은 집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다. 빨래에서 퀴퀴한 냄새가 날 때면, 창문을 열고 2층임에도 왜 설치되어 있는지 모르는 창살 밖으로 다세대 주택들의 벽돌벽을 볼 때면, 춥고 더워도 해와 바람이 잘 들고 널찍했던 옥탑 집을 가끔 떠올린다. 나는 이곳에서 움츠러들고 있었다.


거주 공간의 이동은 계급 이동과 결부된 경우가 많다. 허름한 곳에서 살기 시작한 누군가가 성실하게 살고 자산이 늘어나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는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잘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금융자본에 눌린 문화자본에 대해 종종 무감해지고, 문화자본을 의식하느라 정작 그것이 딛고 있는 생의 존엄에 대해 간과한다. 하재영 작가는 지역 이동과 계급 이동, 그가 필사적으로 사수해 온 ‘읽고 쓰기’의 힘을 거쳐 온 집의 순서대로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수사를 동원해서 이야기하지 않지만, 경험을 돌아보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가 살았던 집에서의 장면 장면은 어떻게 한 명의 사람을 존엄하게 살도록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나 다름없다. 사회는 물리적으로 하나의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는 자리의 문제(130쪽)이기 때문이며, 자리를 지키는 것은 존재를 지키는 것(138쪽)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기만의 방과 300파운드가 필요하다.


어딘가에 최종적으로 정착해서 살겠다는 목표는 그것이 영구적인 행복과 안정감으로 이어지리라는 오해와 관련이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고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하재영 작가는 자신의 엄마를 기억한다. 엄마는 넓은 집에 살 때도 자기만의 자리가 없던 사람이다. 가족 중에 가장 책을 많이 읽지만 서재의 주인이 아니고, 모든 방과 살림에 관여하지만 어느 곳도 전유하지 못하는 삶. 나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에 대해서라면, 역사적으로 공간이 어떻게 성별화, 계급화되었는지 문학을 공부하던 시기에 많이 읽어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의 구체적인 삶과 글쓰기가 주는 실감은 무뎌질 수 없도록 읽는 사람을 붙잡아 흔든다. 지나온 집들을 되짚으며, 정치적, 정신적 독립을 소망하며 하재영 작가는 집을 옮기고, 가꾸고, 살아냈다. 그의 공간의 역사를 따라 읽으며, 나 또한 사회가 일반화하는 편견을 되풀이하며 움츠러드는 일을 멈추고, 주체적으로 이 자리에서 나의 삶을 해석하고 구성해나가자고 새삼 다짐했다.


모이지도 않는 돈을 모으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처지에 이상한 사치를 한 게 아닐까. 그러나 이 비좁은 곳에서 사는 동안, 그게 얼마일지는 몰라도 나를 지키는 노력을 놓지 말아야지. ‘사는 동안은 내 집이니까, 월셋집이든 전셋집이든.’(102쪽) 비비안 마이어는 공개하지도 팔지도 않고 평생 사진을 촬영한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예술가 내지는 작가라고 정체화했을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가장 사랑한 일을 그저 계속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나의 것을 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 나는 여긴다. 액자가 오면 어디에 두어야 하나, 안고 자야 하나. 이 글을 쓰는 동안 돌린 빨래가 다 돌아간 소리가 난다. 코밑에 벌써 실내건조용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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