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하루
읽고 쓰기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미루고 있던 영화 <영원과 하루>를 보았다. 더는 시를 쓰지 못하는, 죽어가는 시인이 과거를 더듬고 단어를 더듬는 이 영화를, 백석의 삶을 더듬어 간 이야기를 읽기 전에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시인은 비슷한 모습이 많아서,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으며 종종 <영원과 하루>를 떠올렸다. 시를 쓰지 못하게 된 시인은 시를 쓸 수 있었던 시절을 돌아본다.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갔다. 자신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가 어느새 무너져 있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묻는 일로 일관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세계에서 나만 단숨에 현재로 떠나온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사랑해야 했던 사람도, 내가 썼다는 시들도 다 여기가 아닌 먼 곳에 남아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영원과 하루>에서 알렉산더가 구해준 아이는 알렉산더에게 단어 하나를 알려준다. 아르가디니. 그것은 ‘몹시 늦었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홀로 떠나온 게 아니다. 몹시 늦어버린 것이다. 시만은 놓지 않겠다는 순하고 여린 마음으로 조용히 버티는 동안, 시가 없는 자리로 점점 밀려난 것이다. 순하고 여린 마음은 때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행은 당에 반기를 들고 나서 숙청당하는 길도, 당이 요구하는 선전시를 적극적으로 쓰는 길도 택하지 못한다. 수많은 세계와 함께 그의 세계도 불탔다. 삼수로 가는 길에 자신을 알아보고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오래전에 시에 쓴 이유로 삼수로 가는 게 아니냐 묻는 서희에게 기행은 답한다. “지금 보니 교원 동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시는 쓸 능력도 없는 사람이올시다.” 언젠가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는데.
그러나 눈이 푹푹 나리는 밤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 밤들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고, 안 살았다 할 수도 없고, 다시 경험할 수도 없다. 돌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앞으로 가는 것도 잘못이다. 다른 쪽을 보는 것도 잘못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 또한 잘못이다.* 기행은 천불이 난 밤에 알게 된다. 저절로 생겨나 숲 전체를 태우고, 불탄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을 여는 천불을 보며. 내일은 그렇게 오는 것임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쓴 뒤 난로에 던져 넣으면 아침에 재가 됨을 확인하자 새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 시가 기행이 한때 쓰던 시들과 같은 시인지, 당이 요구하는 시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적어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쓴 시였을 거라는 사실이다. 벨라는 기행에게 말한다.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시인의 윤리이자 시의 윤리이다. 우리를 빠져나온 양을 양사로 몬 뒤 「관평의 양」을 썼을 때 기행은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폐허에서 재건된 김일성광장을 보며 조국이 해방될 때 자신의 나이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나이와 비슷했음을 떠올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을 몰다 하늘에 뜬 달을 보고, 달빛은 자신이 이 땅에서 사라진 뒤에도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과 하루>의 마지막에 알렉산더는 안나에게 묻는다. 내일은 얼마나 걸리지? 안나는 대답한다. 영원과 하루. 밤이 지나면 오는 것이 내일이지만, 뒤늦게 지난 시간을 붙들고 있는 시인에게 내일은 영원이 걸려 오는 것이기도 하다. 삼수군 관평리 독골의 방목장 앞에서 천불을 보며, 아마도 기행은 영원과도 같은 일곱 해를 지나 내일을 살게 되었다. 그의 내일이 더 아름다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원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달빛이고 불타버린 시임을 아는 삶이 그에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돌려주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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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