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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Dec 16. 2020

이름을 간직하는 일

읽고 쓰기 — 김이설, 『잃어버린 이름에게』

얼마 전 엄마가 암 수술을 했다. 수술을 받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다. 수술을 했다고 말하겠다. 환자로서, 적극적인 의료적 조치를 통해 더 큰 위험을 최대한 통제하려 시도하는 데 동참하는 사람으로서 암 수술을 했다. 엄마의 몸은 마트 일을 하면서, 자기 몸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여기저기 인대와 뼈를 다쳐 성한 구석이 없다.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나이 먹으면 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어쩌면 정합적인 몸이다.


그러나 엄마의 몸은 어쩌면 이상한 몸이다. 가족력이 있어 엄마만이 아니라 나도, 엄마와 엄마의 직계 가족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엄마가 암에 걸릴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고(그렇다고 예방이 가능한 것도, 예방을 위한 대단히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지만), 엄마는 원래 체격이 있고 몸이 잘 붓는 편이라 체중, 당뇨, 혈압 등으로 고생하지 않기 위해 근 몇 년은 식사도 소탈하게 해왔다. 저녁은 잘 먹지 않았고, 기회가 되는대로 짬짬이 걸었다. 그런데 암이라니. 참 나.


김이설의『잃어버린 이름에게』를 펴서 「우환」을 몇 페이지 읽다가, 처음에는 그대로 덮었다. 엄마의 수술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심란한 마음들을 하루하루 주섬거리고 있었는데, 자궁경부암일지도 모르는 근주의 일상을 그대로 읽다가는 맨정신으로 있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내가 수술하는 것도 아닌데 요란이다 싶었다. 엄마가 담담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는 엄마 앞에서 담담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엄마가 돌아서면 속이 속이 아니었겠듯이, 나도 (엄마에 비할 바 아니나) 침착하기 어려웠다.


나는 슬플 때 슬픈 것을 본다. 아플 때도 아픈 것을 본다. 사회가 사람의 죽음에 무관심해서,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아서 참담할 때는 참담하게 사람이 죽어간 이야기를 보면서 더 슬퍼하고 더 화를 낸다. 감정을 꽉 뭉쳐서 어딘가로 쏘아버린다. 주로 잘 보이지 않는 나의 안쪽 어딘가로. 때로는 빈 데가 없는 나의 자취방 벽으로. 허공으로. 이런 습관은 슬픔이 오는 경로가 잘 보이지 않을 때, 내 슬픔의 생김새를 그려보기 어려울 때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나의 일이었다면 나의 아픔과 가까운 소설이나 영화를 주저 없이 보았을 것이다. 나의 일이었다면. 수술을 마치고 엄마가 말을 하고 일어나 걸을 수 있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가끔 읽으려다 만 『잃어버린 이름에게』가 떠올랐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수술일은 다행히 휴무일이었다. 수술이 아침에 시작된다고 해서 나는 새벽에 알람을 맞췄으나 듣지 못하고 30분을 더 잤다. 서둘러 대강 씻고 도시를 옮겨 병원에 도착했으나 월요일 아침의 대학병원은 입구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입장 절차가 길었다. 나는 정문 밖으로 이어진 줄에 서서 한참을 초조해했다. 병실을 찾아갔을 땐 엄마가 이미 수술에 들어간 후였다. 개인정보이기 때문인지 병실 앞에 적힌 입원 환자들의 이름은 한 글자씩 하트로 처리되어 있었다. 엄마의 이름 중 두 글자를 보며, 엄마의 이름을 속으로 몇 차례 되뇌었다. 엄마가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 하면 엄마가 조금 더 잘 올 것만 같았다.


『잃어버린 이름에게』의 인물들과 엄마는 삶의 궤적이 크게 다르다. 식사는 주로 할머니가 차리던 우리 가족의 삶 속에서, 심화반 엄마들이 친목 모임을 할 때 일을 하던 엄마는 나이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위치를 옮겨 다녔다. 아마 이제는, 엄마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얼마 전에 퇴직한 엄마가 몸을 쉬게 하고, 모아둔 돈이 병원비를 비롯한 여러 용도로 삽시간에 증발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막막함 가운데 『잃어버린 이름에게』를 읽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의식도 하지 못하고 도움도 주지 못한 엄마의 우울감과 좌절감,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생각했다. 엄마의 삶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을 것들. 내가 아는 한 엄마는 정신과에 간 적도, 우울증 약을 먹은 적도 없다. 그렇게 나이든 엄마의 몸에 암세포가 생겼다면, 과학적인 이야기든 아니든, 정합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나의 죄책감을 정리 정돈하기 위한 간편한 귀결이다. 엄마는 아마 약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진료를 받거나 약을 먹는 일은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에게』의 인물들이 편견 없이 정신과에 가 적당히 증상을 말하고 적당히 약을 받아 적당히 삶을 붙잡아두는 모습―그들의 노력과 고민은 몸이 저절로 망가질 정도로 무거움에도 불구하고―은, 신도시라는 배경과 굳이 말하자면 ‘요즘 엄마’라는 이미지 위에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제는 옛날 사람인 나의 엄마가 남은 삶을 적당히 붙잡아두지 않게 하도록 나는 어떤 가족이 되고 있나. 방점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술 부위에서 피가 아직 많이 나와서 엄마의 퇴원 일자는 미뤄지고 있다. 병원비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와, 엄마를 아무도 돌볼 수 없는 집을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입원 기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엄마는 내가 새로 가져다드린 책도 다 읽었을 것이다. 내가 가져간 책은 재미있게 읽어주는 엄마. 동생에게는 부탁하지 않지만 내게는 머리를 감겨 달라고 말하는 엄마. 다음 주 휴무일 전에 엄마가 퇴원할까. 엄마는 요즘 대만 드라마들이 보고 싶다고 한다. 엄마의 이름에는 난초가 들어가 있다. 아직은 엄마의 삶이 많이 남아서, 우리가 조금은 할 수 있는 게 남아서, 한참을 내내 푸르다 끝나면 좋겠다. 지금은 결국에 끝날 수밖에 없을 그때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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