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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Nov 26. 2020

우리 춤추지 않을래요?

읽고 쓰기 — 안희연,『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친구를 3년 만에 만났다. 그간의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는 못했지만, 오래 떠들었고 많이 걸었다. 만나지 못한 3년 동안 그를 생각할 때면 주로 그의 춤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는 춤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춤 수업들이 으레 그렇듯 마지막에는 공연을 했고, 나는 거기서 그의 춤을 처음으로 보았다. 프로 댄서처럼 춤추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기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지금도 몇몇 동작이 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 몸을 웅크렸다 펴고, 수그렸다 들고, 앉았다 일어나고, 구부렸다 늘이는 그의 동작들은 신비로웠다. 춤을 추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렇게 느꼈다. 그런 일을 해낸 그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3년 사이에 나는 피나 바우쉬와 부퍼탈 탄츠테아터가 공연하는 <카페 뮐러>를 알게 됐다. 어느 한겨울의 두 달, 시를 배운 선생님의 책 덕분이었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피나 바우쉬의 무대가 궁금해져서 <카페 뮐러>의 공연 영상을 처음 재생했을 때는 조금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단지 잘 짜인 동작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실은 자연스러워지도록 엄청난 양의 연습을 했겠지만―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무용수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말하기 위해 무대 위에 있었다.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때 알았다. 춤은 표현하려는 사람의 것이구나. 친구의 춤이 아름다웠던 것도 그가 표현하려는 게 있었기 때문이구나.


“말이 되지 못하는 슬픔은 춤이 된다.
말이 되지 못하는 기억은 춤이 된다.
말이 되지 못하는 사랑은 춤이 된다.”
(안희연, 윤예지,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힙합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힙합을 좋아하거나 래퍼를 꿈꾸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춤을 추는 동아리가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아주는 운동치에 몸치여서 어릴 적부터 스포츠를 비롯해 몸으로 하는 활동과는 담을 쌓았다. 고등학교 1학년 초에 찾아오는 동아리 입부의 시기에 힙합동아리를 선택한 건, 그런 나의 이력을 바꿔보겠다는 확고한 결심이나 상세한 계획이 아니라 댄스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튀어 오른 막연한 충동 때문이었다. 나는 성실하게 반복해서 익히는 거라면 곧잘 하는 편이었다. 대책 없이 입부한 첫날 아무렇게나 비트를 타보라는 무섭게 생긴(아마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들의 말에 가만히 서서 손가락만 까딱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얼마쯤 배우면 나도 프리스타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매주 하루 토요일 오후의 연습은 몸치가 춤꾼이 될 만한 양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배운 동작을 잘 따라하는 것 이상으로 춤을 통해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교본을 익히듯 동작들을 연마하는 이유는 그 동작들을 바탕으로 자기 춤을 추기 위함이다. 춤을 잘 춘다는 개념을 동작의 완성도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 나는, 정해진 군무를 출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자유롭게 춰야 할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교무실을 들락거리다 보면 어떤 선생님들은 내가 힙합동아리인 게 의외라고 말하곤 했다. 동아리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등수나 놀이문화를 고려하면 심화반 학생이 거기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등학생인 나는 이미지나 평가는 대단히 편향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몰랐으므로, 그런 말을 들으면 나의 무엇이 의외인지, 내게 의외의 지점이 있는지 더 많이 고민하곤 했다.


영화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클레어(커스틴 던스트)가 준 미션의 하나로, 드류(올랜도 블룸)가 숲속에서 막춤을 추는 장면이다. 드류는 자기 기분대로 아무렇게나 몸을 흔드는 일 같은 것은 조금도 해본 적이 없을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겅중겅중 뛰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인 동작을 선보일 때, 조용한 숲속에서 그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존재였지만 인생 전체에서 가장 이상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 이상함이 좋아서 그 부분만 몇 번을 돌려봤다. 나도 ‘아무렇게나’가 가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마 드류가 그런 막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이 완전히 망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에게는 그 감정들을 드러낼 여유도 언어도 없었다. 계기가 없었을 뿐 그는 어쩌면 준비된 무용수였던 셈이다. 내게는 그런 감정이 없었을까. 나 또한 세상 그 누구보다 슬프고 애통한 감정들에 시달린 시간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나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춤을 한 번도 추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다. 최소한 한 번쯤은, 드류의 막춤을 떠올리며 인적이 드문 숲에 들어가 방방 뛰기라도 해볼 걸.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은 얼마나 많은지. 최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몇날 며칠에 소화되지 않는 감정들을 몸 곳곳에 매달고 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다 문득 서점 한쪽에 놓인 선생님의 책을 보고,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팔다리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매달린 응어리들이 풀어지지 않을까. 신비나 의외 같은 것들은 그렇게 오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이라면 철저히 혼자가 되어 팔다리를 허공에 젓는 게, 아무도 모르게 몸을 구부려 애통하는 게 괜찮을 것 같은 순간에. 할 줄 아는 동작은 없어졌지만, 오히려 더 몸이 가는대로 끙끙 앓으면서.


친구의 춤에서 내가 느낀 아름다움은 어쩌면 말하지 못한 그의 고통을 막연하고 순진하게 받아들인 결과다. 그는 때때로 내가 무슨 이야기든 잘 들어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가 말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도 제대로 감각한 적 없는 게 아닐까. 이 두려움과 미안함까지 매단 채로,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다. 우리 춤추지 않을래요? 도저히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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