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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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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Jan 05. 2022

어떤 '인트로덕션'도 아닌

영화 <인트로덕션>

1.

한동현 원장이 자리를 비우자 환자들은 그를 기약 없이 기다리게 된다. 간호사는 배우에게 견디라고 말한다. 한동현의 기도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는 이 말은 일종의 명령인데, 그게 무엇이 되었든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견디지 않으면 다음은 주어지지 않는다. 영호가 동현을 기다리듯, 동현 역시 신의 응답을 기다린다. 이 영화가 인트로덕션의 역할을 한다면 관객은 다음을 기다리는 의무를 부여받는 셈이다. 우리는 영화를 기다려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2.

미소는 영호를 만나러 가다 다리에서 잠시 멈춰선다. 그가 영호를 만나러 가고 싶은 것인지, 혹은 죽고 싶기라도 한 것인지 관객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3.에서야 제시되는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따르면, 미소가 영호의 베를린행 제안에 너무 좋겠다고 말하고 두 사람이 포옹할 때 그것들은 모두 가짜일 이유를 상실한다. 그것들은 '사랑'이며, 한 남자와 한 여자라서가 아니라 안았기 때문에 사랑이다.
그러니 영호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음에도 미소가 멈춰섰다는 사실이 쉽게 잊히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안았으므로 거기에는 사랑이 있다. 중요한 것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조금 이상하다. 영화가 겨우 '주저하기도 했지만, 결국 만났고 안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3.1.

성국이 영호를 안는 3.으로 가보자. 갑자기 영호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3.이 다른 점은, 다른 사람들이 영호를 기다린다는 데 있다. 엄마와 배우가 영호의 도착을 기다리고, 성국이 영호가 일어나기를, 영호가 하려는 얘기를 듣기를 기다린다. 왜 영호는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영호는 더이상 안는 사람이 아니라 안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사람일 때 영호는 누군가를 안는 사람이기도 했다. 3.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영호를 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호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이 안는 사람이라는 도식은 특별히 유의미하지도 않고 영화의 문제의식이 되기에도 어려워 보인다. 조심스레, 성국이 영호를 기다려서 안으면 어떤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는지 묻게 된다.


3.2.

3. 에는 사람이 아니라 바다를 기다린 사람도 있다. 영호의 꿈 속에서 죽으려고 바다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미소와, 영호를 바라본 것인지 알 수 없는 윤희가 그렇다. 윤희가 영호 쪽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과 영호를 보았다면 알은체를 했으리라는 의심은 윤희가 의도적으로 영호를 외면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관객을 끌고 가지만, 우리에게는 윤희가 그저 바다를 보고 있었을 뿐이라는 쉬운 판단이 있다. 바다를 기다려 얻는 것은 죽음이다.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이 아닌 영호가 바다를 기다리지 않고 바다로 들어갈 때, 그에게 죽음을 얻으려는 마음 따위는 없다. 자신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기다린 것, 아마 그것이 되고 싶었던 단순한 마음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3.3.

기다리는 사람이 안는 사람이라면 영호는 그저 안기고 싶은 듯하다. 그는 배우해도 되겠다는 말에 배우가 되려고 결심하고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때문에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다. 성국이 그를 안았을 때 영호가 그대로 안겨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안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국의 포옹이 성국에게는 사랑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간호사와 미소에게도 그 포옹들이 사랑이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안는 것은 사랑일 수 있지만, 안기는 것도 사랑인지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컨클루전.

영화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매듭지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지만, 포옹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들이 새는 모습을 방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방치가 의도적인지 확신하기 어려워, 관객에게 기다림을 요구하는 이유가 일관된 메시지의 후속 영화를 예고하는 것인지 그저 '인트로덕션'이라는 말의 의미를 수사적으로 동원해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의 여백을 수습하는 것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끝내 유예된 채로 발화되지 않는 영호의 말을 공백으로 남긴 채, 우리는 다음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바깥을 맞이할 뿐이다. 과다노출 없이도 밝은 자리에서 이미 우리는 연기와 사랑을 오가고 있다. 이 책이 새로 도입한 것은 없다는 결론이 이미 쓰여져 있는 책의 서문을 굳이 다 읽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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