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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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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Aug 03. 2020

이야기는 이야기만으로 설 수 있는가?

영화 <토니 타키타니>


영화라는 형식은 극장과 집단 관람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은 이제 특정한 형태의 영화적 체험―가령 스코세이지가 <아이리시맨>에 관해 부탁한 방식―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며, 스코세이지가 미국 현대사의 한 부분에 주해를 붙였듯 영화를 주해하며 볼 수 있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스코세이지가 밥 딜런의 삶, <무간도>에 자신의 주해를 붙일 즈음 만들어진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주해를 붙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전적인 우연성으로부터 쓴 이야기는 인간의 숙명적 고독에 관해 말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후반부, 연회장에서 스승(전 고용주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수도 있다)이 먼저 가려는 토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남아 달라고 말한 이후, 토니는 가버리고 그가 하려던 말은 전달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는, 달리 말하면 내부적으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모든 이야기는 맥락적일진대, 토니의 고독은 숙명적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모종의 이유로 모종의 순간 발생해버린 것이라면, 해결(소멸) 가능한 것인가? 코누마를 보고 토니는 자신이 실은 늘 고독했고, 그것을 익숙하게 견뎌왔을 뿐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코누마가 ‘먼 세계로 날갯짓하는 새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옷이 그녀에게 얹혀 있었다.’,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등의 말이 덧붙여진다는 점을 기억하자(‘아름다운 새를 붙잡아 가둬놓자 새가 죽어버렸다’는 흔한 모티브를 떠올리는 일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 토니와 코누마는 고독을 공유하는 관계라기보다, 자신의 결여를 채우는 코누마를 토니가 애완하는 관계로 성립된다. 날갯짓을 할 수 없게 된 새가 새의 운명을 다 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다.


토니의 방식이 고독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서 영화는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나레이션―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들―이 불쑥 인물의 대사로 들어오면서, 스스로 소설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대사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진술문까지 스스로 말하게 되면서,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사람이 되는 데엔 가 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토니 타키타니>가 말하는 고독은 토니 자신의 고독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 밖에서, ‘먼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렇게 침투되고 설정되는 고독임을 인정할 때에만 숙명적이다. 소설적인 영화와 영화라는 매체를 빌린 주해 작업 사이에서 이 고독은 헤매게 된다. 그것은 누구의 고독이 되는가? 진술을 강제당하는 인물의 모습이 그들의 텅 빈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동질감을 느끼는 관객의 것이 될까? 만약 그렇다면 ‘토니 타키타니’는 무엇의 이름인가?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과 자유주의의 세계에 제 삶-이름을 결정당한(혹은 결정당했다고 생각하는), 혹은 결정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이름일까?


결정적으로 영화가 자신의 (불)가능성과 씨름하는 부분은 주연배우들의 1인 2역에 있다. 코누마가 죽은 뒤 공고를 보고 온 히사코는 코누마와 ‘비슷한 체형’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다. 이 차이는 ‘별 거 아닌 차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 연주 중인 아버지에게 토니가 “대체 뭐가 바뀐 거예요?”라고 묻고 싶은 차이다. 히사코가 코누마의 드레싱룸에서 울게 되는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한 연민, 토니의 기이한 요구에 대한 긴장과 공포, 자신에게 딱 맞는 고가의 옷들 사이에 둘러싸인 이질감 등으로는 깨끗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문학적 공동空洞을 남긴)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소 비약적으로 간명해진다. 그가 죽은 자신의 드레싱룸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우는 이유를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울음에서 틈새를 드러내는 이야기의 바깥을 포착할 수 있다.


한편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받은, 같은 사람으로부터 방치되어 외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토니의 경우는 어떠한가? 쇼자부로와 토니는 많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영화가 코누마의 옷방에서 웅크리고 누운 토니의 모습을, 같이 수감된 자들이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총살되는 형무소에서 웅크리고 누운 쇼자부로의 모습과 오버랩시킬 때, 토니의 ‘감옥 같은’ 고독은 감옥에서의 고독을 유비한다. 시대적, 개인사적 맥락을 소거한 이 유전적인 도식은 고독의 숙명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영화가 토니를 위해 이렇게 변명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절점이 있다. 이에 앞서 토니는 쇼자부로가 죽는 모습을, 그러니까 자신이 죽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은 보통 불가능하므로 이에 대해 상상할 수는 없지만, 관념적으로 이렇게는 애써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만큼 자신과 자신이 동일시되고 고독해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는 오로지 관객의 일로 떠맡겨진 공감이다. 토니는 이미 죽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쇼자부로와 동일하게 누워, 동일한 위상에 있는 히사코가 잊히지 않을 수밖에 없다. 아마 원작에는 없을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연결되지 않는 전화로 영화는 토니와 코누마 간의 단절을 유지하려 하지만, 이미 잊히지 않는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드러내는 토니의 모습을 보여준 시점부터 다른 축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영화로서 <토니 타키타니>의 실패는 단순히 목적한 바를 해내지 못한 데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 <토니 타키타니>에 주해를 붙인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이야기가, 그 내부에서 다 해결할 수 없는 난망한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실패다. 이 실패는 형식으로서 영화의 실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토니 타키타니>가 보여주는 균열의 지점들을 통해서, 영화가 어떻게 ‘먼 세계’인 바깥과 관계 맺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영화를 사후적으로만 보는 숙명―그야말로 숙명적인―을 지닌 주해가로서의 관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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