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F Not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용 Oct 11. 2024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SF적 상상

- 모래인간, 까말솔의 <이별로 와요>를 통해 사고실험하는 현대사회

죽음 이후의 세계들에 대한 상상력들


죽음은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거나 전유하고 싶은 욕망들을 이야기를 통해 구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들이 반복되어 왔다. 이는 SF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우선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가장 먼저였다. 이는 의학의 발달로 인해 질병의 극복과 평균 수명의 연장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20세기 초반까지의 소설들에서 유토피아를 그릴 때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이후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거듭되면서 이전에 마법이나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영원불멸에 대한 구현을 논리적으로 재현하는 모습들이 주로 나타났다.


(중략)


<이별로 와요>의 죽음 이후 세계와 과학기술


언급한 바와 같이 <이별로 와요>에서의 죽음 이후의 세계가 특징적인 것은 단순히 사후에 외계행성으로 옮겨지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옮겨진 행성에서 지구에서의 과학적 지식들을 적용해 영혼들에게 맞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사후 세계들이라고 여겨졌던 공간의 설정과 결정적으로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마르마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외계행성은 처음부터 지구에서 죽은 영혼들이 모여드는 장소는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지구 근처에 구멍이 생겨나면서 지구에서 죽은 영혼들을 빨아들여 행성과 연결되면서 영혼들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외계행성으로 옮겨오게 된 지구의 영혼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들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익숙한 법칙들로 구성되는 사회로 바꾸는 일종의 테라포밍(Terraforming)을 진행하게 된다.


(중략)


현대사회(사후세계)에서 필요한 것들 


<이별로 와요>에서 보여주는 SF적 상상력은 결국 현대 사회의 단면들을 향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의해서 구축된 영혼들의 사회는 결국 현대사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우선 ‘지금 여기’를 인식하고 주변의 존재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마로스에 도착한 영혼들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기억이 사라져 있는 경우들도 있어 적응을 잘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응을 위한 시설이 존재하지만 그곳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만을 제공하여 계몽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구조들은 마치 라투르가 지적했던 계몽주의가 초래했던 시대의 명과 암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척박한 행성을 테라포밍해 영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로 기술의 발달이 고도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략)


이러한 문제는 결국 과학기술로 만들어 낸 관측 장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실상 상대방과는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러한 소통을 결국 인간들 간에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물들과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물들의 의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물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사물들이 우리 주위에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Thoery)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나와 주변의 위계가 아닌 평평한 존재론적인 상황에서의 대칭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인 이소하 박사에게 우선 필요했던 것은 지구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아들을 ‘이 별’로 오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마르마로스, 이소하와 아들 간의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 ‘이별’이라는 상태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 그리고 과학기술이라는 현대적 상황들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 글은 포스텍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웹진 《크로스로드》2024년 10월호(통권 229호) "SF-Review"섹션에 실렸습니다. 본문 일부를 여기에 옮겼고, 전문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것은 결국 모든 생명들에 대한 이야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