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해울의 『세 개의 적』에서 제기되는 질문과 사고실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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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로봇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SF라는 장르에서 로봇(robot)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Rosumovi Univerzální Roboti)』(1920)에서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적』에서 등장하는 질문들 역시 그것들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우선은 작품이 배경이 되는 채굴 행성이 이름인 ‘차페크’이다.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조합했던 작가의 이름과 같은 행성인 이곳에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이야기들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은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반목하게 되고, 결국 지구상의 인간들이 종말을 맞이하고 로봇만 남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차페크의 희곡을 보면 인간과 로봇 간의 공존의 문제는 결국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로봇이 등장하는 SF에서 고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세 개의 적』은 그러한 로봇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 놓은 차페크의 희곡에 대해 재질문을 하고 있다. 이는 행성의 이름뿐 아니라 작품의 다양한 곳에서 차페크의 희곡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행성의 관리 본부장인 도민이라는 이름은 차페크의 희곡에서 로숨 로봇 공장의 주인의 이름이다. 주인공인 서영하는 차페크의 희곡에서의 로숨과 같이 로봇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면서, 로봇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에는 이르지 못하고 문제를 발생시키는 헬레나와도 닮았다.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간이 모두 멸종하고 로봇들만 남은 것처럼 『세 계의 적』 에서도 종국엔 인간들이 멸종하고 EL들만 남게 된다. 하지만 『세 개의 적』은 차페크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세계에 대해 재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사고실험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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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적』의 이야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는데 바로 제목에서 언급된 ‘세 개의 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1, 2, 3부의 제목으로 제시된 ‘이샨 누카’, ‘EL’,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1부의 이샨 누카는 차페크 행성으로 이주해 온 소수 민족 노동자의 이름이고, 2장의 EL은 서영하의 주도로 만들어진 ‘Electric Labor’ 즉, 로봇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3장의 인간은 이주민도, 로봇도 아닌 선택받은 기득권층의 관리자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인간 모두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 3부까지 읽고 나면 이들을 모두 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질문할 수밖에 없다. 특히 1부와 2부의 존재들은 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한 사건들이 대개 오해나 편견들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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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술의 발달을 통해서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적들을 극복하는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인식에 대한 전회를 이루고, 공존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영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멸종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주변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적들과 공존하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반목하며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이들과 반드시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시대는 오히려 더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대별로 생물학적인 성별에 의해서, 정치적인 지향성에 따라, 빈부에 따라, 문화와 국적에 따라, 인종에 따라, 혹은 종교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박해울의 『세 개의 적』은 우리가 결국 서로에 대해서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존의 가능성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멸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간으로 이 지구에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하는, 어쩌면 인간다움이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개념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포스텍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웹진 《크로스로드》2025년 7월호(통권 238호) "SF-Review"섹션에 실렸습니다. 본문 일부를 여기에 옮겼고, 전문은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