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을 때 사람들은 T.P.O를 생각한다. Time, Place and Occasion.
비단 패션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을 할 때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뉴스에서만 듣던 산업재해, 들리는 동료들의 이야기. 들으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 나에게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승무원으로 일을 한다고 하면 떠오르는 밝고 상냥한 모습, 잔머리 하나 빠져나오지 않은 단정한 머리에 화장. 그 모습으로 해내야 하는 육체노동의 강도는 의외로 가혹하다. 하이힐을 신고 7킬로짜리 기내가방이 가득 찬 머리 위 선반을 몇 십 개씩 닫아야 하고, 무거운 음료가 올라간 음식 카트를 끌고, 손님에게 전달될 음식을 담은 접시 수저 그릇 등등. 지난 10년 동안 내 몸을 아끼며 일을 하자 주의였는데 일이 터지려니 어이없이 4시간 비행에서 사달이 터졌다.
유난히 그날따라 카트가 무거웠다. Bar cart라고 와인과 샴페인 맥주, 미니어처가 담긴 드로워가 가득, 반대편에는 탄산음료 가득한 드로워, 7개의 팩 주스가 담긴 드로워 그리고 욱여넣을 수 있을 만큼 힘껏 집어넣은 물들이 12병이 함께 같이. 이 모든 게 한 카트에 들어있었다.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해도 어쨌든 몇 번은 카트를 이리저리 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Bar 카트에 필요한 서류들을 적고 자물쇠를 채우려고 하는 순간
"뿌직" 하고 오른쪽 등에 강한 전류 같은 게 흐르는 것 같더니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10년 가까이 비행하면서 이런 적의 통증은 처음이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부사무장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이게 갑자기 왔다가 갈 수 있는 통증일 수도 있고 계속 심해질 수 있으니 지켜보자고 했다. 그래 지켜보자. 15분이 지났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몸통을 좌우로 돌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부사무장에게 기내에서 일을 하다가 다친 경우 작업해야 하는 서류를 적어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럴 경우 부사무장은 조종실에 들어가서 그라운드에 있는 메디컬 팀과 연락을 해야 하고, 나는 연락하는 순간부터 비행을 할 수 없으며, 이코노미 승무원의 포지션이 바뀌어야 하며, 이미 착륙 준비를 하고 있는 조종실은 바쁘며, 우리는 높은 지대 위를 날고 있어서 이것 조차도 연락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알고 있다. 상황이 복잡하고 모든 것이 개런티 되지 않은 상황인 것을.
내가 상사에서 원한 것은 연락이 닿던 닿지 않던 조종실에 들어가서 크루의 상태를 조종실에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라운드에 있는 메디컬 팀에 연락을 해 보는 것, 될지 안 될지 그건 나중의 일이다. 그리고 내가 이 비행에서 다쳤다는 것을 서류상으로 남겨야만 했다.
만약에 내가 다친 상황을 서류로 남기지 않은 채 혼자 병원을 가게 되어서, 정말 크게 다친 경우 비행을 못하게 된다. 그렇게 비행을 못하게 되는 날은 내 기본급을 깎아먹으며 나을 때까지 통원 치료를 해야 한다. 반면 내가 다쳤다는 서류가 제출된 경우에는 "Injury On Duty"로 처리가 되어 치료를 받을 때까지 아무런 임금 삭감이 없다. 다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이런 뒷일까지 내가 생각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겪지 않았으면, 회사 매뉴얼을 열어서 확인을 해 보면 되는 것.
위로의 말을 건넬 줄 모르겠으면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말지...
내 옆에 앉아서 이 상황에 대해서 부사무장이 정리를 한다. 아니 부사무장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부사무장 :
"네가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15분이 지났어. 조종실은 이미 착륙준비를 하고 있어서 바쁠 거고, 그 뒤에 기장님이 방송을 만드셨어. 어차피 우리는 지금 고도가 높은 지역을 비행하고 있어서 이 작은 비행기 기종은 그라운드랑 연락이 잘 되지 않아. 확실한 건 잘 모르니까 착륙하고 내일 쉬는 날이랬지? 병원 가서 의사 만나봐.
내가 이렇게 결정을 내린 이유는 네가 "I was okay"라고 했기 때문이야."
I WAS OKAY?????????????????
트리거였다. 이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지금 내 허리인지 등인지 앞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생활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걸린 상황이다. 그리고 비행에서 다친 경험이 있어서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나 보다 높은 포지션이어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하라고 회사 매뉴얼이 존재하고 모두가 열람 가능하다고 생각을 한다.
나 : "네 이야기 다 끝났니? 오케이. 먼저 'When did I say I was okay?'"
부사무장의 눈이 번뜩, 갑자기 내 팔목을 잡는다. 뭔가 잘못됨을 감지한 거다.
나 : 그리고 네가 15분 동안 지켜보자고 한 거였지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조종실에 이야기는 했어? 전화로도 나는 네가 하는 거 못 봤어. 그라운드에 있는 메디컬 팀에 연락이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 시도해보지 않았잖아. 그리고 이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뭔가 잘못되었을 때, 서류 작업이 되어 있지 않으면 Injury on duty로 커버 안 되는 거 알잖아. 내가 틀리게 말한 거 있으면 말해줘."
이제야 부사무장이 아이패드를 열어 매뉴얼을 확인한다. 정말 화가 났다. 모든 것을 잠정적으로 그러하리라 생각을 하고 나한테 이야기를 해 놓고 이제야 회사 매뉴얼을 확인하다니.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다.
부사무장 : "작은 비행기에서 이 포지션 처음이니? 원래 이 비행기는 그래. 그리고 내가 최근에 메디컬팀에 연락 한 케이스는 크루가 컨테이너에 머리를 박아서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났었어. 그 경우 말고는 연락한 적이 없어"
WHAT??????????????
정말 화가 났다. 나는 다쳤고 메디컬 팀에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나를 초보 승무원으로 몰아가려는 건지, 위로를 한답시고 더 심했던 케이스를 이야기를 해 주는 건지.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나 : "비행기 착륙하고 나서 웰페어에 같이 가자. 그리고 메디컬 리포트 적어줘. 봤다시피 나는 무거운 거 못 들어.. 최대한 정리는 하겠지만 마무리는 네가 해줘야겠어."
이 말을 남기고 나는 착륙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상사에게 이렇게 까지 이야기를 하나 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있으면서 내가 얻은 교훈은 내가 할 말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를 호구로 본다는 것이다. 호의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내 권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하며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같은 포지션이든 높은 포지션이든 내 이야기를 듣는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다.
들숨 날숨이 반복되면서 흉통이 심해졌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랜딩 후 웰페어에 가서 상황 설명을 했더니 웰페어에 계신 분도 부사무장에게 내가 비행을 하다가 다쳤다는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라고 한다. 그래, 결국 해야 하는 거잖아.
부사무장의 마지막 말이 대박이었다.
"If something goes wrong, text me."
마치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 말과 자기 연락처를 남기고 떠났다. somthing goes wrong, 당연히 연락을 받겠지만 내가 상황이 호전된다고 해도 알리고 싶지 않을거야.
며칠 지난 일이라 지금은 감정의 동요가 그렇게 심하게 치지 않는데, 이 일이 있었던 당일날 입사 이래로 가장 화가 났던 날이다. 리더가 된다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이를 바득바득 갈았으니 말이다.
괜찮냐, 내가 할게 이런 말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는, 적어도 한 번은 공감해 주었으면 나도 똥그랗게 눈 뜨고 한 마디 한 마디 따박따박 다 따지는 상황에까지 나를 몰아넣지 않았을 것 같다.
웰페어에서 나를 상담해 준 오피서가 따라 나와서 버스에 내 가방을 실어주었다. 플랫 슈즈와 다이닝 재킷, 여벌의 유니폼이랑 별거 들지 않은 헐렁헐렁하고 가벼운 가방을 옮겨주는데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다. 어금니 꽉 깨물고 버스 천장 바라보면서 버스에 앉아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Take good care of yourself dear, everything will be okay. You go to see a doctor and keep me update, if you really can't move alone, please contact us."
안다. 빈말인거 알지만 그래도 그 오피서의 행동은 말보다 더 많은 위로가 되었다. Action shows more than words..정말 맞는 말이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나는 퇴근을 했다. 하필 비행한 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든 병원이 문을 닫았다. 의사를 만날 수 없었고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통제를 주는 것뿐이었다.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하루를 쉬고 의사를 만나러 갔다. x ray랑 정밀하게 확인해 볼 수 있는 모든 절차들을 마친 후 의사가 이야기했다.
의사 : "그날 비행기에서 아팠던 건, 몸이 보낸 신호였어. 거기에서 더 움직였으면 심하게 다쳤을 수도 있어. 다행히 뼈가 잘못되거나 그런 건 아닌데.. "
뼈가 잘못된 거 아니면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내가 가장 걱정한 부분이 괜찮다고 하니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의사 : "일단 이 상태로 다음 비행을 가는 건 무리니까 쉬도록 해. 치료 10 세션 끊어 줄 테니까 중간중간에 불편해지면 찾아오고."
사실 내가 지내고 있는 곳의 병원에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정밀하게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말의 그 미묘한 아픔까지 표현하는 데 어쩌면 내 표현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아무튼 병원에서 서류들을 받아서 나와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 선 말로 그렇게 까지 나를 보호하려고 했었어야 했나? 부사무장은 다른 방법으로는 나를 위로하거나 달랠 수는 없었을까?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게 기억이 났다. 어떤 말을 무슨 의도로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느냐라는 것. 내가 느꼈던 부사무장의 말은 나의 아픔보다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니까 나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인생은 카르마라고 너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라고 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 나에겐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니까.
나도 만약에 누군가를 위로해야할 상황에, 아무런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말로 불필요하게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다음에 네가 함께 비행하는 리스트에 나타나면 내가 조용히 사라져야지.
장혜진이 부릅니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