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는 절약
2020년, 작년 한 해 나를 꾸미는 데 인색했다. 9만 5000원 어치 셔츠 두 벌과 바지 두 벌. 이게 들인 돈의 전부였다. 화장품을 안 샀고, 미용실에서 머리도 하지 않았다. 올해도 꾸밈 소비에 야박할 예감이 든다. 남은 옷과 신발이 건재하여 버리고 새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과 머리에도 꾸밀 만한 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년에 10만 원도 안 되는 꾸밈비. 결과적으로 절약에 도움이 되긴 했으나, 돈을 아끼려고 옷과 화장품을 안 산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꾸밈에 인색하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서히 꾸미지 않게 된 첫 계기는 아이들이었다.
2년 전이었다. 나는 화장대를 팔았다.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 안전 때문이었다. 당시 두 딸은 3살, 5살이었는데, 이맘때 아이들이 그렇듯 호기심과 에너지가 왕성했다. 아이들은 화장대 서랍을 수시로 열었다가 쾅 닫으며 장난쳤다. 아주 완연한 천둥벌거숭이들.
정작 나는 육아에 치여 하루 5분도 화장대 앞에 앉지도 못하는데, 괜히 아이들 손만 다칠 것 같았다. 미련 없이 팔았다. 단 돈 만 원에. 대신 파우치에 화장품 몇 개만 챙겨 화장실에서 화장했다. 화장대를 치우자 안방은 안전하고 넓어졌고, 나는 씻자마자 그 자리에서 화장하는 편리함에 눈을 떴다. 꾸밈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차츰 꾸밈에 태연해지기 시작했다.
화장대를 팔아치운 이후 1년 뒤.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다. 나는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화장을 하고 싶을 때만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아이들 안전과 상관 없이, 나를 구하고자 한 일이다.
그때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하던 참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화장을 하지 않았고 복장도 편했다. 편안한 상태로 일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선택적 꾸밈. 그들의 좋은 문화에 동참하고자 스킨, 로션에 선크림만 바르며 다닌다. 화장하면 더 예쁘겠지만, 매일 더 아름다울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화장 대신 밥 한 숟가락 더 먹고 든든한 속으로 출근했다. 화장을 포기하니 배가 불렀다.
화장대를 버리고, 화장품을 덜어냈다. 이제는 단발 머리가 될 시간이었다.
비누 하나면 됩니다
한 달 전, 샴푸가 거의 바닥나자 미용실로 갔다. 의자에 앉아 미용사분께 비장하게 부탁드렸다.
"짧게 잘라주세요."
자발적 몽실이가 된 사연은 아이들 그리고 나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다. 조금 더 거창하게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랄까. 나는 비누로 머리를 감기 위해 단발이 됐다. 머리가 짧아야 비누로 감아도 스타일이 사니까.
분리수거만 하면 재활용이 된다는 믿음이 산산조각 난 이후, 샴푸의 플라스틱 통이 거슬렸다. 플라스틱을 집에서 차츰 줄여나가는 중이다. 플라스틱 통을 덜 쓰기 위해,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어 자발적 몽실이가 된 나는 비누로 머리를 감는다.
단발이 된 이후, 비누 하나면 충분하다. 세수에서 머리 감기, 그리고 샤워까지 비누 하나면 된다. 스타일을 비누에 맞추며, 좋아하던 긴 머리를 포기해야 했지만,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즐거움은 꾸밈의 즐거움을 가뿐히 능가했다.
보는 책마다 플라스틱의 위험을 경고했다. 플라스틱은 세상에서 가장 재활용하기 힘든 재질이며, 우리나라 플라스틱의 물질 재활용률은 약 23퍼센트에 불과하다고(<우리는 일회용이 아니니까>, 고금숙, 슬로비). 또한 한국의 인천 해안과 낙동강 하구는 세계 미세플라스틱 오염 2위, 3위를 나란히 달리고 있다고(<2050 거주불능지구> ,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추수밭).
오늘 당장의 수질오염 상황도 좋지 않지만, 더 너머의 시간을 상상한다. 2030년에 우리가 마실 물, 2050년 바다에 물고기보다 많아질 플라스틱이 걱정된다.
식탁도 위험하다. 미세 플라스틱은 우리가 직접 마시는 수돗물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든다. 각종 동식물의 혈관과 물관 속으로 흘러, 간접적으로 생태계 먹이 사슬을 통해 한 바퀴 돌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먹이 사슬의 최고 꼭대기는 우리, 인류다. 한 영국 슈퍼마켓 조사에서 홍합 100그램당 평균 70조각의 플라스틱이 검출됐다는 것도 책 <2050 거주불능지구>를 보고 알았다.
기후위기에도 플라스틱은 적이다. 플라스틱은 자외선에 반응하면 메탄을 뿜어낸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더 강력한 온실가스다. <우리가 날씨다>의 저자,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표현에 따르면 '이산화탄소가 보통 두께의 담요라면 메탄은 206cm 두께의 담요'인 정도다.
재활용도 안 되고, 씻고 마시는 물과 식재료 더 나아가 기후위기까지 촉진하는 플라스틱. 이 요망한 물질을 하나도 안 쓰며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줄일 수 있는 만큼은 줄이며 살고 싶었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방편으로서 화장대와 화장품과 긴머리를 차츰 놓았다.
나도 구하고, 지구도 구하고, 계좌도 구하는 일
바쁜 아침, 밥은 안 먹어도 마스카라 만큼은 정성껏 발랐던 지난 시절. 나는 어떤 상태를 선망했던 걸까? 교수님 말씀에 귀 기울여 공부하기에 적합한 '기능하는 몸'보다 겉보기에 곱게 분칠한 '보여지는 몸'을 중요하게 여겼다.
화장대, 샴푸와 바디워시, 긴머리와 화장. 기능보다 미관이라니, 뭔가 이상했지만 으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화장대나 샴푸, 바디워시처럼 있어야 하는 줄 알았던 것들은 없어도 괜찮았고, 긴머리와 화장처럼 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일들을 안 해도 별 탈 없었다.
덕분에 1년에 9만 5000원이면 된다. 나의 돈과 시간, 기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돈과 시간, 그리고 생태계의 기능을 회복하는 데 작은 보탬도 되었다. 합성계면활성제와 미세플라스틱 사용을 조금이라도 안 썼으니까.
어떤 절약은 나를 돌본다. 돈을 덜 쓴 만큼 자산을 축적해서 나를 살리기도 하지만, 너무 수많은 물건으로부터, 꾸밈 노동과 같은 의무로부터 담담해질 수 있다. 덜 소비하면 천연자원은 덜 채굴된다. 화석연료로 만들 전기와 물건도 줄어들면, 하늘에 묻힐 탄소배출물과 땅과 바다 그리고 생태계에 쌓일 미세플라스틱들도 줄어들 것이다.
지구를 구하려다 경제가 망하겠다며 걱정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할 경제적 대가가 더 크다. <2050 거주불능 지구>의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는 '기후변화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경제성장 곡선과 비교하자면 세계 각국의 1인당 소득은 21세기 말까지 평균적으로 23퍼센트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했다.
올해는 지금까지 7만 2900원이 들었다. 단발머리 미용비 1만원, 밑창 갈라진 슬리퍼 대신 새로 산 슬리퍼 2만 9600원, 그리고 스킨, 로션, 클렌징 워터 3만 3300원. 이 돈은 나를 위한 비용으로 전혀 인색하지 않다. 개인적 경제적 자유와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을 구하는 데, '사지 않는 일'은 가장 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