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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Feb 20. 2021

선을 긋자

2021년 기후위기대응 규칙

간장비빔국수를 했다. 국수 고명? 그런 정성 없다. 팽이버섯과 호박, 계란 두 알 넣고 휘휘 저어, 프라이팬에 살짝 볶는다. 삶은 국수에 막 만든 계란야채볶음을 얹고, 간장에 들기름, 그리고 통깨만 얹으면, 이래 봬도 어엿한 간장비빔국수 완성이다.


그런데 마음이 이상했다. 계란 때문이다. 동물성 식품이라 탄소 배출물이 높다. 동물복지 계란이긴 했지만 유정란이었다. 닭에게는 아기였을텐데. 닭에게 못 할 짓을 해버렸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맛있게 먹었다. 1초의 미안함. 찰나의 고민으로는 내 먹성을 막지 못했다.



야채 피자를 했다. 또띠아에 피자 소스를 바르고, 다진 양파, 호박, 팽이버섯, 그리고 피자 치즈 순서로 켜켜이 쌓았다. 10분 정도 굽고 나니, 팽이버섯은 촉촉, 구운 호박은 부드러워졌다. 맥주까지 곁들여 먹었다. 이 피자가 마음에 들어 한 판 더 구워 먹고야 말았다.


그런데 또 기분이 이상했다. 원인은 피자치즈. 우유로 만든 이 모차렐라 치즈 속 탄소 배출물과 송아지한테는 젖도 배불리 못 물리고 생이별했을 어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맛있었다. 비빔국수를 먹을 때처럼 잠깐 미안했을 뿐, 맛있어서 두 판 구워 먹었다.



양가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반찬에는 고기가 그득했다. 장조림도 있었고, 소고기 갈빗살도 있었다. 소고기 갈빗살은 차마 구워 먹을 수가 없었다. 100g 가격 보고 손이 떨려 굽질 못 했다.


그렇다고 아끼다가 똥 되게 둘 수는 없는 노릇. 다섯 개로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렸다. 필요할 때 볶음밥도 해 먹고, 나들이 갈 때 주먹밥으로도 동글동글 말아봤다.


맛있다. 얼마만의 돼지고기, 소고기인지.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과 합의 본 원칙인 '내 돈 주고 직접 붉은 육류(돼지고기, 소고기) 사지 않기'는 지켰다. 하지만 어찌 됐건 뱃속으로 소고기가 들어갔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 정도면 됐어.


지구에 무해하게 사는 게 뭐 이리 어렵냐. 먹을 때도 온갖 동물성 식품을 먹어서 불편한데, 아직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다.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아무것도 모를 때 사 둔 아크릴 수세미가 아직 잔뜩 남았다), 먼 길 달려온 커피(푸드 마일이 너무 길다!), 도서관 갈 때 탔던 자동차, 플라스틱 안에 포장되어 있는 맛난 선물들...


일상의 걸음걸이마다 폭력의 발자국이 남는 듯, 개운하지 않다.


"선을 긋자."


더 잘하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다그치다가, 내가 다칠 것 같다. 오래 살려면? 선 안에서는 만족하고 즐기며 살아야겠다. 도 넘은 자아비판을 멈추기 위해, 선을 그어본다.


1) 목표: 2021년 12월 31일까지


2) 규칙

 - 채식 지향: 내 돈 주고 직접 붉은 고기(돼지고기, 소고기)는 사지 않는다. 

   동물성 식품은 뭐든 죄책감이 들어 먹을 때마다 체할 것만 같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먹는 닭고기와 나머지 해산물, 달걀, 유제품류는 맛있게 먹자. 물론 보상심리로 펑펑 먹어버려서는 안 된다.


 - 플라스틱 제로: 1주일에 한 번, 플라스틱 배출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다.

   얼마만큼 줄일 수 있을지, 2021년 연말까지 도전한다. 올해 목표는 '기록'이다. 완전한 '플라스틱 제로'가 가능할지는 차분하게 지켜보자.

(플라스틱 배출 기록은 블로그에 남기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ahyun0421)


  - 소비: 하루 식비 15000원, 하루 생활비 15000원. (생활비 = 의류, 의료, 유류, 교통, 여가, 잡화)

   기후위기에 '최소한'의 소비가 좋은 거야 당연하다. 문제는 '최소한'의 기준이 끝도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돈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15000원' 하루 예산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돈을 쓸 때마다 지구에 미안해해서 문제다. 그러니 15000원 안에 소비했다면, 나를 너무 다그치지 말자.


헤어드라이기가 고장 났는데, 고쳐 쓰지 않고 새로 사는 바람에 마음이 착잡했다. 더 잘하면 좋겠지만, 적정선에서는 나를 돌보며 하자. 조금씩 조금씩 더 잘하면 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도 없는 노릇.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후 위기 대응이 한 번에 만족스러울 수도 없다.


채식 지향, 플라스틱 제로, 소비. 세 가지 정해진 규칙에서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기분 좋게 계란 프라이를 먹자. 커피도 마시고. 샐러드에 마요네즈도 뿌려 먹자. 잘 그은 선이 제법 마음에 든다. 이 선 안에서 나도 지구도 구하자. 지속 가능한 지구 1개어치의 생활을 위해.


선을 긋자. 규칙만 지켰다면, 잘했다고 쓰담쓰담 해주자. 샐러드 위의 마요네즈쯤... 음... 괜찮아 괜찮아. 수고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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