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긋자

2021년 기후위기대응 규칙

by 최다혜

간장비빔국수를 했다. 국수 고명? 그런 정성 없다. 팽이버섯과 호박, 계란 두 알 넣고 휘휘 저어, 프라이팬에 살짝 볶는다. 삶은 국수에 막 만든 계란야채볶음을 얹고, 간장에 들기름, 그리고 통깨만 얹으면, 이래 봬도 어엿한 간장비빔국수 완성이다.


그런데 마음이 이상했다. 계란 때문이다. 동물성 식품이라 탄소 배출물이 높다. 동물복지 계란이긴 했지만 유정란이었다. 닭에게는 아기였을텐데. 닭에게 못 할 짓을 해버렸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맛있게 먹었다. 1초의 미안함. 찰나의 고민으로는 내 먹성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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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 피자를 했다. 또띠아에 피자 소스를 바르고, 다진 양파, 호박, 팽이버섯, 그리고 피자 치즈 순서로 켜켜이 쌓았다. 10분 정도 굽고 나니, 팽이버섯은 촉촉, 구운 호박은 부드러워졌다. 맥주까지 곁들여 먹었다. 이 피자가 마음에 들어 한 판 더 구워 먹고야 말았다.


그런데 또 기분이 이상했다. 원인은 피자치즈. 우유로 만든 이 모차렐라 치즈 속 탄소 배출물과 송아지한테는 젖도 배불리 못 물리고 생이별했을 어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맛있었다. 비빔국수를 먹을 때처럼 잠깐 미안했을 뿐, 맛있어서 두 판 구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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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반찬에는 고기가 그득했다. 장조림도 있었고, 소고기 갈빗살도 있었다. 소고기 갈빗살은 차마 구워 먹을 수가 없었다. 100g 가격 보고 손이 떨려 굽질 못 했다.


그렇다고 아끼다가 똥 되게 둘 수는 없는 노릇. 다섯 개로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렸다. 필요할 때 볶음밥도 해 먹고, 나들이 갈 때 주먹밥으로도 동글동글 말아봤다.


맛있다. 얼마만의 돼지고기, 소고기인지.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과 합의 본 원칙인 '내 돈 주고 직접 붉은 육류(돼지고기, 소고기) 사지 않기'는 지켰다. 하지만 어찌 됐건 뱃속으로 소고기가 들어갔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 정도면 됐어.


지구에 무해하게 사는 게 뭐 이리 어렵냐. 먹을 때도 온갖 동물성 식품을 먹어서 불편한데, 아직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많다.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아무것도 모를 때 사 둔 아크릴 수세미가 아직 잔뜩 남았다), 먼 길 달려온 커피(푸드 마일이 너무 길다!), 도서관 갈 때 탔던 자동차, 플라스틱 안에 포장되어 있는 맛난 선물들...


일상의 걸음걸이마다 폭력의 발자국이 남는 듯, 개운하지 않다.


"선을 긋자."


더 잘하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다그치다가, 내가 다칠 것 같다. 오래 살려면? 선 안에서는 만족하고 즐기며 살아야겠다. 도 넘은 자아비판을 멈추기 위해, 선을 그어본다.


1) 목표: 2021년 12월 31일까지


2) 규칙

- 채식 지향: 내 돈 주고 직접 붉은 고기(돼지고기, 소고기)는 사지 않는다.

동물성 식품은 뭐든 죄책감이 들어 먹을 때마다 체할 것만 같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먹는 닭고기와 나머지 해산물, 달걀, 유제품류는 맛있게 먹자. 물론 보상심리로 펑펑 먹어버려서는 안 된다.


- 플라스틱 제로: 1주일에 한 번, 플라스틱 배출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다.

얼마만큼 줄일 수 있을지, 2021년 연말까지 도전한다. 올해 목표는 '기록'이다. 완전한 '플라스틱 제로'가 가능할지는 차분하게 지켜보자.

(플라스틱 배출 기록은 블로그에 남기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ahyun0421)


- 소비: 하루 식비 15000원, 하루 생활비 15000원. (생활비 = 의류, 의료, 유류, 교통, 여가, 잡화)

기후위기에 '최소한'의 소비가 좋은 거야 당연하다. 문제는 '최소한'의 기준이 끝도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돈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15000원' 하루 예산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돈을 쓸 때마다 지구에 미안해해서 문제다. 그러니 15000원 안에 소비했다면, 나를 너무 다그치지 말자.


헤어드라이기가 고장 났는데, 고쳐 쓰지 않고 새로 사는 바람에 마음이 착잡했다. 더 잘하면 좋겠지만, 적정선에서는 나를 돌보며 하자. 조금씩 조금씩 더 잘하면 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도 없는 노릇.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후 위기 대응이 한 번에 만족스러울 수도 없다.


채식 지향, 플라스틱 제로, 소비. 세 가지 정해진 규칙에서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기분 좋게 계란 프라이를 먹자. 커피도 마시고. 샐러드에 마요네즈도 뿌려 먹자. 잘 그은 선이 제법 마음에 든다. 이 선 안에서 나도 지구도 구하자. 지속 가능한 지구 1개어치의 생활을 위해.


KakaoTalk_20210217_055241030_02.jpg 선을 긋자. 규칙만 지켰다면, 잘했다고 쓰담쓰담 해주자. 샐러드 위의 마요네즈쯤... 음... 괜찮아 괜찮아. 수고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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