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책, <선생님의 보글보글>이 나오기까지.
"대관령만 넘자!"
강원도 작은 바닷가 마을, 고등학생 시절 나와 친구들의 꿈은 대관령 넘기였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수능 대박에 매달렸다. 그게 지긋지긋한 태백산맥을 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철부지 10대라서 꾸던 소망이었을까? 아니었다. 선생님들과 부모님은 자주 동해시를 우물이라 불렀다.
"서울 아이들이 1시간 공부할 때, 너희는 2시간 공부해야 따라잡는다."
"아무리 잘 해도 우물 안 개구리야. 그러니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개구리였다. 우물 밖을 벗어나기 위해 문제집을 풀어대는 개구리. 더 열심히 공부해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어른들의 격려였지만 나도 모르게 소심해졌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할지라도 서울 아이들만큼 잘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왜냐하면 넓은 바다의 아이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니까.
우물 안 개구리는 대관령을 넘어 춘천교대생이 됐다. 만족스러웠다. 아주 잠시 동안만. 우리는 곧 다시 서울과 경기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춘천교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도 임용에 합격하기를 꿈꿨다. 고향이 서울, 경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수도권으로 빠져버렸다. 썰물처럼.
우물 탈출 레이스의 무한궤도
나는 다시 대관령을 넘었다. 이번에는 역방향이었다. 강원도 임용을 쳐서 고향인 동해시로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였다. 우물 탈출 레이스가 끝난 줄 알았건만 착각이었다. 우리는 매일 학교로 출근하며, 스스로를 개구리로 여기며 체념하거나 분투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곁에 선 다른 아이들도 "도계가 좀 부족한건 사실이잖아요"하며 말을 보탰다. 나는 속이 상했다. 이건 겸손을 위한 자기낮춤도, 농담을 하기 위한 현실 비틀기도 아니었다. 철저한 체념과 자기 수긍에 가까웠다. 객관적 지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방에 있는 대학의 연구 성과나 교육 수준이 서울의 유수 대학보다 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방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과소평가 받을 까닭은 없다.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
울산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좀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GDP 1~2위를 다투었던 유복한 동네, 울산에서도 '지방'에 대한 얕은 자조가 있다. 하지만 대관령 안쪽 동네 아이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깊은 고민도 없이 빠르게 자신의 삶을 과소평가하는 데 속이 상했다. 강릉시에서도, 삼척시의 탄광촌 도계에서도 여러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랬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불안을 고스란히 투영할 뿐이었다. 20세기 어린이였던 오늘날 어른들이 '우물 탈출 레이스'에 여전히 올라있듯, 21세기 어린이들도 여전히 그 무한궤도에 탑승한 것이다. 삼척에 사는 어른들은 원주를 부러워하고, 원주에 사는 어른들은 수원을, 수원은 서울을, 서울은 그 안에서도 강남을 꿈꾼다. 아이들도 그렇다.
삼척은 원주에 밀리고, 원주는 수원에 밀리고, 수원은 서울에 밀렸다. 뉴욕에서 전학생이 오지 않는 한 서울이 '짱'을 차지하는 구조였다... 아이들은 벌써 '지잡'의 삶이 대도시보다 못하다고 인정해버린다.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막연하다. 불안의 기원도, 불안의 해소법에도 정답은 없다. 각자의 방법으로 불안을 상쇄하는 수밖에. 남편은 남편 방식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울산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동해로 우물 탈출 레이스에서 역주행 한 남편만의 방식. 그것은 '지금, 여기'를 만끽하기였다.
아이들의 '지금, 여기'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오마이뉴스에 '로또 교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교실 속에서 아이들에게 로또 같은 순간들을 남겼다. 아이들의 버킷 리스트는 살 빼기고, 수학익힘책 이름 란에는 '곤듀'(공주의 극존칭)나 '귀염뽀짝'이 쓰여져 있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도 4학년 2학기 다각형 단원에서는 숨을 쉬고, 모든 친구들을 V자 얼굴형, 큰 눈망울, 가녀린 다리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금손은 사람 마음 읽는 재주가 있다.
나는 금손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뭘 해도 잘 먹고 잘살 것이다. 사람 마음 얻으면 다 가진 거지 뭐.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
동시에 남편은 주간지 시사IN에 '학교의 속살'을 연재했다. 학교폭력, 도농격차, 인성교육, 교원 성과급, 기후위기, 자식 맡긴 학부모의 애환, 지방 2부 리그의 삶까지. 어른의 불안이 학교 곳곳에서 어떻게 스며있는지를 썼다. 무려 4년이다. 4년 연재한 오마이뉴스와 시사IN의 원고들이 모여 <선생님의 보글보글>이 됐다.
부모는 아이들을 걱정하지만 교실 일은 잘 알지 못한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어버린 것을 단순히 '학업'이라고만 여기는 우리 어른의 상상력으로는, 교문이 닫혔을 때의 아이들 심정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학교 안 가니 공부 안 해서 좋겠네'라며 쉽게 말하기에는, 아이들에게 학교란 그렇게 간단한 공간이 아니다.
교실 속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우리 부부의 두 아이도 이 작은 바다 마을의 교실에서 수학익힘책 뒤에 '곤듀'라고 쓰고, 학기말에는 생크림과 치즈를 잔뜩 올린 카나페를 먹으며 설탕에 취해 '올해 우리 담임샘 너무 좋지 않았냐?' 같은 당중진담을 주고 받으며 살아갈테니까.
나의 두 딸이 아빠 책에서 그린 교실 속 아이들처럼 보글보글 살아간다면 엄마로서 더 뭘 바랄까. 우리는 초등교사이고 지방에 산다. 지방, 여기는 우물이라 하기에 충분히 넓고 깊다.
어쨌든 여러분, 지방은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너무 겁먹지는 말아주세요.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