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나는 지역 맘카페를 탈퇴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당시 맘카페에서는 코로나19에 걸렸을지도 '모를' 교사들에 대한 비난이 세차게 몰아치는 중이었다. 나는 교사다. 과장해서 이웃집 밥 숟가락까지 알 수 있는 좁은 지역사회에서 언제 비난의 표적이 될지 몰랐다.
카페 회원들이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19 집단 감염 때문이다. 그 와중에 전국 곳곳의 원어민 교사들이 이태원에 다녀왔다. 원어민 교사들은 이태원 클럽에 다녀오지도 않았고, 코로나19 검사 결과도 음성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2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우리는 코로나를 여전히 잘 몰랐고, 모두가 두려웠다.
문제는 공포 앞에 혐오가 일상화되고 심지어 정당화 되며 호응을 얻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혐오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관련 인터넷 댓글이든 지역 맘카페든, 논조는 한결 같았다.
'아이들은 원격학습하느라 지쳐가는데, 어떻게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이 시국에 외출을 한다는 거냐.'
가슴이 벌렁거렸다. 나도 황금연휴 동안 마트도 다녀오고, 동네 책방에서 책을 사서 읽었다. 나도 손가락질을 받을 것만 같았다.
죄는 없지만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다.
-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중, 김지호 지음
과연 나의 동선은 결백한가. 확신할 수 없었다. 나의 동선은 앞으로도 결백할 것인가. 그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마스크를 잘 쓰고, 손소독제를 질척하게 바르고 다니기야 할 것이다. 방역지침을 어기지도 않을 거고, 혹여 역학조사를 한다 해도 한치의 거짓 없이 분명하게 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코로나에 걸린다면? 나의 동선은 그 어디라도 결백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궁금하다. 자신의 동선에 결백한 사람이 있을까. 집 밖은 그 어디라도 떳떳할 수 없었다. 코로나의 시대는 그렇다. '이 시국에' 그 어디가 안전한 곳일까.
결국 나는 맘카페를 탈퇴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뉴스의 댓글들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치명률만큼이나 사회적 후폭풍은 너무나 무섭다. 코로나의 시대, 견제 말고 연대를 외치는 글. 어디 없을까?
'어쩌면 나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르는 코로나 완치자 에세이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책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 완치자가 쓴 첫 에세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코로나에 걸린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우리가 상상하고 두려워했던 사회적 혐오와 차별, 배제의 민낯 그대로가 적나라하게 그려져있다. 어쩌면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다.
김지호 작가는 KF94 마스크를 꼼꼼히 쓰고 손소독제를 틈틈이 발라왔다. 하지만 운이 나빴다. 할머니 장례식에 찾아와줬던 친구들에게 답례로 식사를 대접하다가 그만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확진자'는 '환자'와 같은 말이지만, 사회는 김지호 작가를 '바이러스' 취급했다. 그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회사에게 송구해 해야만 했고, 고개 숙이고 사죄했다. 사람들은 그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심성 없이 코로나에 걸려버린 사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코로나를 옮길지도 모르는 잠재적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코로나 완치 이후에도 회사로부터 '회사 밖에서 좀 더 자유롭게 일해 볼 것'을 권고 받고 퇴사했다.
나도 피해자인데, 세상은 나를 피해자라고 하지 않는다. ... 나는 그저 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명확한 건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 하나인데, 주변인들은 자신을 잠정적 피해자로 여기며 나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듯했다. 그들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전화 너머 내 귓속을 파고드는 그들의 말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중, 김지호 지음
'코로나에 걸리면 어떤 차별과 배제가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에도 눈길이 가지만, 이 책의 백미는 작가가 존엄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다. 바로 자기계발과 연대와 포용, 공존의 따뜻함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않았다. 병원 바닥에서 두꺼운 요가 매트를 깔고 푸시업과 스쿼트를 했다. 그간 미뤄뒀던 책을 읽고, 글을 써내려갔다. 읍압 병실에서는 에어컨도 틀 수 없어 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고, 하필 샤워 시설도 없는 병실이었지만 수건에 찬물을 적셔 몸을 닦았다. 덥고 몸이 끈적여 불쾌했다고 솔직하게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한다'였다.
열에 시달리던 새벽 3시, 내가 수화기를 들어 열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할 때면 간호사 선생님들은 그 갑갑한 방호복을 힘겹게 입고 바이러스가 잔뜩 있는 병동으로 들어와 내 손에 약을 쥐어주셨다. ... 그들도 무서웠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고 담대하게 매일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고, 바이러스에 무너져가는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나를 살려냈다. -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중, 김지호 지음
동시에 제도의 도움도 받았다. 감염되어 격리된 동안 다행히 월급이 나왔다. 정부정책 덕분에 밥벌이 걱정을 덜었다. 열이 펄펄 끓어 견딜 수 없을 때, 간호사 선생님들께서는 새벽 3시에도 두터운 방호복을 갈아입고 손에 약을 쥐어주셨다.
밥과 간식을 날라주시고, 병실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소독해주시기도 했다. 퇴원할 때, 진료비 2500만 원이 들었지만 자기부담은 0원이었다. 건강보험제도와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덕분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집에서 김밥을 말아다 주었고, 친구들은 건강 보조제를 챙겨주었다. 완치 후, 따뜻하게 환대해준 이웃들이 있었다. 익숙한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견고한 제도와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겁에 질린 채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감염자와 완치자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코로나라는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 자존감과 제도와 가족, 친구라면, 여전히 우리의 기본을 지키는 일은 명백하게 중요하다.
우리는 안전망이 필요하다.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은 모두의 안전망을 산산조각낼 뿐이다. 누구나 코로나에 걸릴 수 있고, 어느 누구의 동선도 완벽하게 결백할 수 없다. 전투적으로 코로나를 막아야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에 걸린 이웃과 완치자들에 대한 위로도 건네야 한다.
내가 걸려도 비난 받지 않을 거란 믿음. 고열과 인후통 속에서 비난의 두려움에 떨기보다 회복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이런 믿음과 환경이 우리가 바라는 진짜 안전망이 아닐까.
"많이 아프셨죠, 힘내세요, 버텨주세요, 부디 쾌차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우리가 건강할 때 아픈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 코로나 시대의 가장 확실한 심리 방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