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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혜 Jan 23. 2022

새 옷 못 입겠다는 딸, 일년 후 엄마가 한 뜻밖의 일

1년 전, 가을 즈음 있었던 일이다.


"엄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근데 새 바지 못 입겠어요."


엄마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차를 돌려 집으로 가셨다. 그날 아침, 엄마는 나에게 전화로 바지 사이즈를 물어보셨다. 바지를 사려고 옷가게를 둘러보시다가 마침 딸 생각이 나신 거다. 엄마는 내게 새 바지를 사주고 싶으셨다.


나는 매번 입던 옷만 입는다. 아는 사람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면, 옷만 보고도 나인 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입는 옷만 입는 내가 스스로 대견하다. 돈만 생기면 계좌가 바닥날 때까지 돈을 쓰던 과거를 청산하고 내 힘으로 돈을 아끼고 모으는 검소한 삶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셨던 모양이다. 딸이 입는 옷만 입는 게 마음 아프셨던 것 같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는 검정 면바지도 예쁘고, 남색도 꽤 단정하다며,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라고 하셨다. 설레고 들뜬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망설여졌다. 옷장에 바지가 많았다. 청바지 세 벌, 치마 바지 한 벌이 있었고, 바지 없이도 입을 수 있는 원피스도 세 벌이나 있었다. 더 이상 새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사코 사양했다. 그렇지만 엄마의 딸 걱정은 못 말렸다. 결국 엄마는 새 바지를 들고 오셨다. 엄마는 내게 옷을 건네시며 한마디 덧붙이셨다.


"얼마게? 맞춰봐~"


세일해서 싸게 산 옷이니, 엄마 주머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입으라는 배려였다. 엄마 마음을 생각하면 거절도 무례겠지만 그럼에도 거절했다.


이유가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새 옷에 박수치고, 헌옷을 걱정하는 문화에 겁이 났다. 대량 생산 뒤의 대량 폐기를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분위기다. 너도 나도 새 옷만 입으면, 그 옷이 버려진 뒤에 어떻게 될까. 실제로 지구에서 1년에 1000억 벌이 생산되고 330억 벌이 버려진다. 1명이 1년에 30kg 버리는 꼴.


그 쓰레기는 다 어디로 갈까? 소각되거나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옷은 다시 개발도상국에서 버려져, 소들이 풀 대신 뜯어 먹는다.

▲  소들이 버려진 옷들을 풀처럼 뜯어먹고 있다.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중 ⓒKBS 환경스페셜

쓰레기 문제는 기후 위기와도 닿아 있다. 쓰레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대량생산되었다는 방증이고, 기후 위기의 원인인 탄소 배출물은 대량생산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태울 때 발생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 따르면, 의류 산업은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 싸게 사서 쉽게 버리는 패스트 패션의 치명적 단점이다.


옷을 세탁할 때도 문제다. 빨 때마다 옷에서는 미세플라스틱이 떨어져 나와 하수도로 빠져나간다. 세계자연보호연맹의 추산에 따르면 전 세계 미세플라스틱 오염의 약 35%는 합성섬유 제품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우리나라 평균 세탁량에 대입하면 1년에 1000톤이 넘는 미세섬유가 나오는 셈이다.


그러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윤동주) 시인은 먼저 슬퍼한 자, 깊이 슬퍼한 자, 끝까지 슬퍼한 자들이 슬픔에 짓눌리지 않고 슬픔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이 조금씩 나아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슬픔은 보시가 된다.

- <있지만 없는 아이들> 중, 은유 지음, 창비 출판사


은유 작가의 책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대단하진 않지만, 나도 슬픔을 보시하기로 했다. 지구의 슬픔에 나도 보태기로 했다. 입는 옷을 오래 입고, 새 옷 대신 중고 옷을 입음으로써,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중고의류 상점 사장님이 부자 되시면 좋겠다


올여름, 인터넷 중고의류 매장에서 중고의류를 네 벌 구입해 봤다. 당연히 새 옷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멀끔했다. 예전에 스웨덴의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새 옷을 사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툰베리가 걱정됐다. 툰베리는 10대 소녀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인데 대체 어쩌자고 저렇게 과감한 말을 할까.


이 걱정은 중고 의류에 대한 내 편견에서 비롯됐다. 중고 의류를 사 보니 알게 됐다. 예쁘고 질 좋은 옷이 남에게도 팔 수 있는 중고 의류가 된다는 걸 말이다. 툰베리도 예쁘고 좋은 옷을 입는다.


중고 옷을 입는 게 마냥 손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 번 생산된 옷이 오래 쓰이는 문화에 작게라도 보탤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질 뿐더러, 가정 경제도 건강해진다.

▲  버려진 코트와 천연섬유를 재사용하여 만든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레타 툰베리.ⓒ보그 스칸디나비아 홈페이지 갈무리

올여름 중고의류를 살 때, 네 벌에 배송비까지 모두 3만 1900원만 들었다. 돈도 절약 했을 뿐더러, 처음으로 옷을 사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중고 옷이야 말로 진정한 '싸게 잘 산' 옷이었다.


우리 집 의류 예산은 남편과 나 각각 6개월에 10만 원인데, 중고 옷을 산 덕분에 이마저도 돈이 남았다. 그래서 저금을 했다. 월급이 남아도, 성과급을 받아도, 명절 보너스를 받아도 새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저축했다. 가정경제가 건강해지고, 옷 걱정도 줄었다.


내 돈이 우리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 의류 산업이 망할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대신 내 돈은 다른 곳에 흘려보내고 있다. 중고 의류 상점으로 말이다. 중고 의류 상점 사장님이 부자 되셔서, 더 많은 중고 의류 상점이 생기면 좋겠다. 사장님이 부자 되려면, 올겨울 옷도 멋진 중고 옷으로 필요한 만큼 사야겠다.


진심으로 중고의류 산업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지금은 옷장에 옷이 그득해도 입을 옷이 없다는 게 미스터리라며 농담하는 시절이다. 하지만 농담 아닌 과학으로는, 지금은 기후 위기 시대이자 인류세다.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물건들이 광고의 힘으로 소비되는 그런 자본주의보다, 중고의류 상점 사장님이 필요하다.



▲  중고의류를 구입했다. 주문시 포장을 최소화해주시길 부탁드렸고, 포장 비닐 하나에 네 벌의 옷이 담겨 왔다.


엄마의 격려


며칠 전, 엄마는 다시 나에게 흰 바탕에 산뜻한 검정 스트라이프가 있는 반팔 블라우스를 건네셨다.


"입어봐~ 사이즈 맞나 모르겠네."


나는 또 머뭇거렸다. 중고 옷을 입는다고 걱정하시는 걸까?


"참, 이건 엄마가 입던 거야. 새 옷 아니다."


엄마는 옷을 물려주셨다. 새 옷이 아니었다. 엄마가 새 옷보다 질 좋은 옷을 물려주시니 힘이 났다. 여전히 헌옷에 대한 사람들 편견이 심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싶다. 우리 엄마가 나를 응원해주는데, 100명이 궁상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다. 나이 서른넷에 아이 둘을 키우는 성인인데도, 그 누구보다 친정엄마에게 칭찬을 받을 때, 내가 잘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새 옷은 예쁘다. 헌옷은 기후 위기와 쓰레기 팬데믹(대유행)에 대한 대응으로서, 검소한 삶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니 새 옷을 입는 사람은 예쁘다고 박수받고, 헌옷을 입는 사람은 마음이 예쁘다고 박수를 받으면 좋겠다. 궁색하다는 험담이나, 새 옷을 입으라는 걱정보다, 격려가 오가는 문화를 꿈꾼다. 문화가 변해야 기후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 글은 2021년 9월 5일 발행된, 오마이뉴스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의 14번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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