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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pr 27. 2022

우리들의 블루스: "애 낳자"라는 말은 낭만이 아니다

언제까지 '순정남'을 불쌍히 여겨야 할까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영주: "우리 선배 언니는 임신 중단하고도 잘 사는데"
현: "애 낳고도 잘 살 수 있어 그 선배한테 아마 나같은 남자가 없었을걸. 너한텐 내가 있잖아"
영주: "변하지 말기, 나 진짜 너만 믿고 직진한다."

몇 날 며칠 임신중지에 대해 고민하던 고등학생 커플의 표정은 갑자기 밝아진다. 그들의 위기가 일시적 혹은 임시적일 것을 암시하는 소나기가 내리고,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뽀뽀를 한다. 영주(노윤서 분)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초반에 "닥쳐 결정은 내가 해. 내 몸이야"라고 현(배현성 분)에게 말한 것은 너무나 우습게 되어버렸다.



이들의 에피소드가 나온 <우리들의 블루스> 5화가 많은 비판을 받은 이유는,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을 다루는 방식이 '낙태죄' 폐지 이후의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 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느 드라마에서처럼 임신중지에 대해 단순히 '태아 생명권 vs 자기 결정권으로 묘사하는 구도가 반복됐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분명 '업데이트된' 임신중지에 대한 관점이 들어있다. 동시에 낙태죄 폐지 이후 후속입법이 안 된 상황에 대한 지적까지 나온다. 영주는 "임신중단 합법화 논의 중이라 아직 보험 적용 안돼서 부르는 게 값이래"라고 말했고, 처음 간 병원의 의사 역시 임신중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고 하며 "일단 부모동의서를 갖고와라"라고 말한다. 현이가 미프진을 사서 영주에게 건네줬지만, 영주가 병원의 경고 때문에 먹지 못하는 장면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업데이트'를 무색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초음파 장면이다. 두 번째로 갔던 병원의 의사는 "여기가 아기 머리고 여기가 팔, 여기가 다리, 장기들은 다 잘 만들어졌네요. 태동도 활발하네? 아이고... 아기가 너무 건강해요. 심장 소리 한 번 들어 볼래요?"라며 심장 소리를 들려준다. 영주는 "하지 마세요"라며 소리를 지르고, 임신중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현이를 잡고 운다.


이후의 전개는 이들이 결국 아기를 낳을 것을 암시한다. 애초에 태아가 6개월(26주)인 상황에서 병원을 찾아간 것 역시 당연히 '출산'을 전제로한 설정일 것이다. 현이는 "낳자", "지울 자신이 더 없다"라고 말하지만, 영주는 "너 때문에 내 인생 다 망쳤어" "지울거야"라면서 계속 임신중지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결국 버스틀 타고 있는 다음 장면에서는 소화기가 터져서 소란스러운 와중에 배가 아픈 영주가 "저 임산부예요!"라고 , 이어 현이는 "여기 임산부 있어요, 저는 애기 아빠예요"라고 외치며 버스를 세웠고, 여기서 황당하게도 밝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현'이라는 남자 캐릭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신중지를 에피소드의 중심에 놓을 거라면 현이라는 캐릭터의 성격은 조금 달랐어야 했다. 착하고 순수한 '순정파'로 그려지는 현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 드라마를 보는 수많은 여성들은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캐릭터는 '제주도가 지긋지긋해서 서울로 가고 싶어하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쉽게 믿지 못하는, 다양한 욕망을 갖고 있고, 임신중지에 대해서도 여러 층위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영주와 정반대이기도 하다.


'순정파'이기 때문에 그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해달라는 걸 해주거나, 옆에 있거나,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존재를 통해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라는 명제는 사라진다. 터무니없이 그는 아기옷 가게 앞에 서서 "그 애 내 아기기도 하잖아"라는 말을 하고, "가장 걱정되는건 여자친구의 몸입니다. 수술하면 많이 아픈가요?"같은 질문을 네이버 지식인에 던진다. '애인의 임신'에 대응하는 남자의 수준을 이 모양으로 그려놓으면, 당연히 드라마 자체가 임신과 임신중지를 다루는 방식도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임신중지를 하려는 영주에게 자꾸 출산을 종용하며 ‘자신이 책임진다'고 말하는 현이의 태도는 무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순수하고 착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포장된다. 나아가 여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 연인과 태아는 내가 지킨다'라는 가부장적인 남성의 태도가, 낙태법 폐지 이후 임신중지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에서 '그럴 수도 있다'를 넘어서 아예 낭만인 양 묘사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에피소드에 나오는 한수(차승원 분)는 자신이 못다한 꿈을 골프선수인 '딸'은 이뤘으면 하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다. 그가 염치불고하고 동생에게 2억을 빌리려고 하는 것도, 심지어는 학창시절 자신을 짝사랑하던 은희(이정은 분)의 마음을 이용해서 "별거중이다, 이혼하려고 한다"라고 거짓말을 해서 돈을 빌리려는 것도 오로지 딸의 유학생활을 위해서다.


심지어 은희에게 속셈이 들키자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고 싶었어. 우리 애 보람이 나처럼 돈 때문에 자기 꿈도 포기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어. 꿈 없이 살아가는 게 어떤건지 난 아니까"라는 변명 아닌 변명까지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수의 처지는 '이해받는 것'으로, 아니 오히려 그가 행복해지며 에피소드는 끝을 맺는다.


이어지는 동석(이병헌 분), 선아(신민아 분)의 에피소드는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는 줄 알았다. 동석과 선아는 학창시절 제주에서, 7년 전 서울에서 만났다. 홈페이지 인물 소개에는 동석에게 선아는 첫사랑이며 순정(?)을 '열일곱과 서른 둘'에 짓밟혔다고 나온다. 그는 여전히 선아가 자신을 갖고 놀았다며 저홀로 원망하고 있다. 반면 선아의 입장에선 동석을 이용하거나 배신한 것이 아니었다. 인물소개에 동석은 '작은 의지처였다'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그의 감정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의 비대칭이야 당연히 드라마에서 다룰 수 있는데, 이것이 너무나 남성중심적인 옛 사랑 이야기인, 속칭 '쌍년 서사'와 다를 게 없어서 놀랐다. 동석의 관점에서만 '낭만'이고 '순정'이었을 뿐이다.


세 인물이 겪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들 입장에선) '남자다움'의 위기다. 한 명은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잃을 위험에 놓였고, 다른 한 명은 두 번이나 구애했지만 실패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사랑하는 연인과 태아를 지킬 수도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들은 '헌신'을 자처하지만, 이는 정작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자기 만족이 더 커 보인다.


남자 캐릭터들의 상당수가 '남자로서의 자존심 혹은 책임감'에 도취해있고, 그 사실이 언제 어디서나 면죄부가 되는 세계관, 입체적이고 복잡한 여성이 남성의 '단순함'을 너그럽거나 귀엽게 봐주면서 비로소 '갈등 해소'가 이뤄지는 이야기. 여전히 나는 소외된 사람들에 천착하는 노희경 작품이 더 다양한 감정과 맥락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쉽게 그의 작품에 대해 단언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리석고 못난 남성의 행동을 '낭만'으로 포장하고, 여전히 그것을 '따뜻함'과 '인간미'의 일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까지는 그냥 넘어가긴 어렵다. 명백하게 시대착오적이다.


*노희경 작가는 여성을 입체적이고 섬세하게 그린다. 여성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그리거나 도구화하는 문제는 노희경 드라마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은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아예 남자 캐릭터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는 의도적이거나 아니면 철저한 현실 고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체적인 여성'은 피해자도 되고, 가해자도 되며,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지만, 그들과 갈등을 빚는 '평면적인 남성'은 주로 억울해하거나 무언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 문제다. '연민의 대상'이 되면 그가 겪는 고통을 해소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밖에 없고, 결국 위에서 지적한 것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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