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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pr 29. 2022

왜 '어린 여성'이 위문편지를 써야 하는가

편지 논란 뒤에 숨은 '어른들'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는 군대 위문공연 덕분에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2017년 곡인 '롤린'에 열광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지난해 뒤늦게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며 역주행을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간을 인내하던 실력파 걸그룹의 뒤늦은 성공이 기쁘고 신기했지만, 군대 위문공연이 대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진행).


위문은 말 그대로 '위로하기 위해 안부를 묻는 것'이다. 징병제 국가에서의 군인은 공공을 위해 궂은 일을 하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위문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위문을 해주는 대상이다. 위문공연의 상당수는 여자 솔로 가수나 걸그룹이며, 남자 가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름을 알릴 수 있고, 반응이 좋다는 점에서 여성 가수들은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국방부(국방TV)가 직접 나서서, 남성들끼리 모인 집단이니 젊은 여성 가수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사기를 진작하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몇달 전 진명여고에서 여전히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여자 중고등학생이 위문 편지를 쓰면 성희롱에 해당하는 답변을 받거나, 학교나 집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학교 측에서는 신상정보를 쓰지 말라고 당부한단다. 즉 이것은 위문편지를 보내는 학교나, 군대 모두 '여자 고등학생의 위문편지'라는 것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작 실제 병사들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잠재적인 성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어린 여성이 편지를 보낸다면 병사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한 셈이다.


나는 실제 병사들이 위문편지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같이 전화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는 편지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하지만 핸드폰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람의 영혼없는 편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군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군대 밖과의 '연결'인데, 답장도 못하고 쓴 사람도 알 수 없는 편지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한국의 징병제가 남성에게 주는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는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와의 단절이다. 그들을 위로해주는 것은 내가 여전히 어느 사회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증명해주는 주변 사람들과의 연락과 휴가를 통한 만남이다. 나 역시 군대 시절 부끄러울 정도로 친구들에게 콜렉트콜로 전화를 많이 했는데, 힘든 환경 속에서 그것밖에는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단절을 해소해주려는 노력은 안 하면서, 아무 의미도 없는 여자 고등학생들의 위문편지는 '좋아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이들이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인 조롱 위문편지'가 논란이 된 상황은 결국 기성세대가 만든 강압적이고 기이한 구조에서 비롯됐다. 보내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가 강요받은 편지이다 보니까 반발심을 갖고 편지를 쓰는 학생이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인 역시 이런 편지를 받으면 즉자적으로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왜 이런 편지가 오게 됐는지 군인 개인은 사정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공개되지 않았을 뿐, 비슷한 사례가 꽤나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해당 편지가 남초 커뮤니티에 공유되며 온갖 욕설과 성희롱, 신상털이에 대한 위협이 난무할 때 정작 책임을 져야 할 학교나 국방부(군 부대)는 나몰라라 하고 있었다. 이 편지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1월 11일이었는데, 1월 12일 진명여고는 "위문편지 중 일부의 부적절한 표현으로 (위문편지 쓰기)행사의 본래 취지와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향후 어떠한 행사에서도 국군 장병에 대한 감사와 통일 안보의 중요성 인식이라는 본래의 취지와 목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라는 입장문을 냈다.


진명여고 학생들에 대한 집단 사이버 불링이 일어나고, 어느 학원 원장이 진명여고 학생을 쫓아낸다는 등 실질적인 피해와 낙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학교는 학생들을 어떻게 보호할 지에 대한 입장을 내놔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군 장병에 대한 감사' 따위의 말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위문편지 폐지 청원 등이 이어지자 뒤늦게 진명여고는 '위문편지를 폐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 역시 진명여고가 직접적으로 밝힌 입장은 아니다.


<한겨레>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도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국방부는 "학교와의 교류 여부는 각 부대에서 개별적으로 하는 것, 국방부 자체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건 없다"라고 했는데, 적어도 이번 사건을 접했으면 위문편지를 없애든가, 여자중·고등학교에서 위문편지 받는 행태가 어느 정도 이뤄지는지 살펴봤어야 한다. 하지만 그저 일종의 '해프닝'으로 생각하는 인상을 받는다.


사실 '위문 편지 사건'으로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국방부다. 군인이 대체 왜 '위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부터 고민이 필요하다. 여전히 군인은 징병제에 희생당하는 존재, 그래서 전 사회적으로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디폴트값으로 깔고 간다. 하지만 군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의 위로가 아닌 노동에 대한 '대가', 더 많은 기본권 보장, 그리고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등이다. 지금 상황은 정작 군인들이 원하는 것은 해주지 못하는 국가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책무를 외주화하면서 다름 없다. 젊은 여성들의 '위문'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다행히 '여자고등학교 군 위문편지 금지' 국민청원이 있었고, 이에 대해 지난 3월 청와대가 "이번 사안을 통해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제도 운영히 여전히 남아있고 꾸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라고 답변했다.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남성은 나라를 지키는데 헌신하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도구'로 쓰이는 국가주의적 젠더 체계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기성세대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건 그들이 신봉하는 젠더 체계는 너무나 남성중심적이면서 동시에 남성을 소외시키며, 여성은 자연스럽게 부수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이다.


젠더갈등이라는 이름의 백래시가 오직 20대 남성의 '공격적인 반페미니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남자 어른들'이 고개 꼿꼿히 쳐들고 성역할 고정관념·성차별에 기반한 관성과 시스템의 '수호신'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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