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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매번 다시 쓰이는 일기장

기억 재응고(Memory Reconsolidation)의 비밀

by 이준유


우리는 흔히 우리의 기억을 서재에 꽂힌 책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책을 꺼내어 읽듯이, 한번 경험한 일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되고,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변하지 않는 원본을 그대로 다시 본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은 이 오랜 믿음에 충격을 줍니다. 가령 당신이 첫사랑을 떠올릴 때, 당신은 원본 비디오를 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사랑에 대한 떠올리는 그 순간, 기억을 다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왜 힘든 기억마저도 다시 '미화'되는지, 이제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현대 뇌과학의 성과 중 하나인 '기억 재응고(Memory Reconsolidation)'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기억은 굳어진다"는 정설의 탄생

기억이 학습 후 시간이 지나면서 뇌에 단단히 고정된다는 개념은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과학적인 견해였습니다. 이를 가리켜 '기억 응고(Consolidation)'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무려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뮐러(Müller)와 필제커(Pilzecker)는 실험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학습한 직후 시간이 지나면 단단하게 굳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Müller & Pilzecker, 1900). 그들은 이 현상을 'Konsolidierung(응고)'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즉, 마치 시멘트가 굳으면 단단히 굳어지듯이, 학습(기억) 또한 뇌에 단단히 새겨진다는 것이었죠.


기억은 젖은 시멘트와 같다. 처음에는 물렁하지만, 시간이 지나 단백질 합성을 통해 굳어지면, 그 기억은 영구적이며 변하지 않는다.


사실, 이 내용이 그렇게 놀랍거나 신기한 건 아닙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기억의 응고를 전제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기억이 그때그때 바뀐다면 법정에서 증인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공부한 뒤 기억을 통해 인출한 내용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 기억의 응고란 새삼 놀라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기억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

하지만 1968년, 기억이 다시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미사닌(Misanin)과 밀러(Miller), 그리고 루이스(Lewis) 연구팀은 쥐에게 전기 충격으로 공포를 학습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포에 대한 기억이 굳어진 쥐에게 '단서(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를 준 뒤, 또다시 전기경련충격(ECS)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쥐들은 앞서 학습한 공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Misanin, Miller, & Lewis, 1968).


이는 기억을 회상(Reactivation)하는 것만으로도, 견고했던 기억이 다시 파괴될 수 있는 상태로 변한다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다만, 당시 학계는 '기억 응고 이론'을 너무나 굳게 믿고 있었기에, 이 현상을 단지 실험 오류나 일시적인 인출 실패 정도로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이 중요한 발견은 30년 넘게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 뉴욕대학교 조셉 르두(Joseph LeDoux) 교수의 연구실에 있던 카림 나데르(Karim Nader)는 이 아이디어를 현대 분자생물학 기법으로 다시 검증하기로 합니다. 나데르는 쥐가 공포 기억을 떠올리는(Retrieval) 바로 그 순간, 뇌(편도체)에 단백질 합성을 방해하는 약물(Anisomycin)을 주입했습니다. 과거의 정설대로라면 이미 저장된 기억은 변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험 결과,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약물을 주입받은 쥐는, 다음날 그 공포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미사닌과 밀러, 루이스 연구팀의 실험이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죠. 즉, 기억은 회상되는 순간 마치 저장되지 않은 상태처럼 다시 불안정해집니다(Nader, Schafe, & LeDoux, 2000). 100년 된 기억의 '응고 이론'이 수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a, b, c는 기억을 회상할 때 약물을 통해 재응고를 방해하자 공포 기억이 감소한 것을 보여줍니다. 반면 d, e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때는 약물이 소용 없음을 드러냅니다.


기억의 재구성: 회상, 불안정, 그리고 재응고

나데르 연구팀의 '기억 재응고(Memory Reconsolidation)'의 메커니즘을 차례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회상(Retrieval): 잠자고 있던 기억을 불러옵니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문서를 일시적으로 '불러오기' 했는데, 뜨문뜨문 글자나 문단 등이 희미한 상태입니다.

② 불안정화(Labile State): 기억이 회상되는 순간 시냅스 연결은 일시적으로 단백질 분해가 일어나며 허물어집니다. 희미한 글자나 문단 등을 '편집 또는 수정'하는 상태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③ 재응고 (Reconsolidation): 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억이 다시 저장되려면, 새로운 단백질 합성이 필요합니다. 희미한 글자나 문단 등을 편집하여 다시 '저장'하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은 뇌 속에서 잠시 '말랑말랑한' 상태가 됩니다. 즉, 우리가 기억을 회상하는 행위 자체가 기억을 조금씩 변형시키고, 새롭게 저장(재응고)하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기억을 100% 신뢰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기억을 편집하는 존재

여전히 우리는 '기억은 고정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 재응고 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과거의 상처가 영원히 고정된 형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유하자면, 기억은 이미 인쇄된 책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다시 쓰는 일기장인 셈이지요. 그러니 과거의 상처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고통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도 없습니다. 재응고에서 발생하는 그 짧은 틈, 기억의 그 짧은 순간이 곧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Reference

Misanin, J. R., Miller, R. R., & Lewis, D. J. (1968). Retrograde amnesia produced by electroconvulsive shock after reactivation of a consolidated memory trace. Science, 160(3827), 554–555.

Müller, G. E., & Pilzecker, A. (1900). Experimentelle Beiträge zur Lehre vom Gedächtnis. Zeitschrift für Psychologie und Physiologie der Sinnesorgane, 1, 1–300.

Nader, K., Schafe, G. E., & Le Doux, J. E. (2000). Fear memories require protein synthesis in the amygdala for reconsolidation after retrieval. Nature, 406(6797), 72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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