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서록 Jan 22. 2023

중소기업 떠돌다가 하는 일

떠돌이 생활이 인내심 문제는 아니다

고등학교가 감옥처럼 답답했던 고3 수험생은, 주 5일 음주제를 열렬히 이행하는 그런 대학생이 되었다. 시험날이 되어서야 시험 범위를 알아도 '허허' 웃으며 다음 술 약속을 잡는 대학생이 말이다. 첫 학기 내내 어찌나 부어라 마셔라 날뛰었던지 주신(神)도 도망간 듯, 2학기부터는 공부를 해야겠다 싶더라. 


그다음부터는 남들 다하는 학점 관리(a.k.a.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주 5일 음주제가 '유월천하'로 막을 내려서인지 금세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스펙을 쌓아보겠다며 이런저런 대외활동도 시작했다. 학술동아리 활동, 공모전 참여, 자격증 취득, 기자활동, 외국어공부 등...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기분이었고 그 기분 자체에 도취되기도 했다. 시도했던 영역 대부분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고, 분명 남들이 선망하는 기업에 칼취업을 할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응, 아니야


현실은 이랬다. 


"요즘 어때?" 


안부 묻기도 조심스러워지는 채용 시즌. 'XX기업 지원한 것 어떻게 됐냐?'라거나 '취업했어?'라는 직접적인 질문은 서로 머쓱해질 수 있기에, 에둘러, 먼 산 바라보기 식으로 물어야 한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질문을 하지 않는다) 


"A사라고, 거기 됐어. 무슨무슨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회사야." 


회사 이름을 말했을 때 '오'라는 반응이 나오는 회사가 아니라면, 상대방이 갸웃거리기 전에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남들은 잘 모르는 규모가 크지 않은 (=월급도 많지 않은) 중소기업에 취업한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 고만고만한 회사 여러 곳을 떠돌았다. 대학을 나와 다녀본 기업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중견기업 (피터팬증후군을 체감하게 해 주었던) 

2. 외국기업의 한국지사 (덕분에 인생 첫 소송을 경험할 뻔)

3. 외국기업에서 투자해서 만든 중소 무역회사 (외국계기업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는)  

4. 스타트업 (좀 더 다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유일한 회사)

5. 직접 개업했다가 폐업 처리한 사업체 (THAAD 맞음) 

6. 여성기업 (여성을 위한 기업은 아니었는데)


대졸자가 20대에 거친 회사 수가 이 정도라면, 얼마 못 다녔다는 걸 다들 추측할 수 있으리라. 이런저런 사건으로 출근조차 제대로 못하고 퇴사(?)당한 회사도 있었고, 한 달 만에 때려치운 회사도 있었다. 가장 오래 다녔던 회사가 스타트업(4번)이었는데, 그마저도 1년 남짓이었다. 



'인내심이 없어서 이렇게 떠도는 건 아닐까?' 


입사와 퇴사가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를 탓하는 듯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내가 성격이 유독 모나서 그런 건 아닐지 생각하며 말이다. 



얼마 전 대학 동기 A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날 A에게 소개를 받아 새로운 친구 K를 알게 되었다. K는 공인노무사로 대기업 계열사를 다니다가 퇴사한 이후 또 다른 기업에 취업했다고 들었는데, 그 이직했던 곳도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서록씨에게 드릴 명함도 이젠 없네요."

 K가 조금 멋쩍은 듯 말했다. 

"K가 그렇단다. 그새 그만뒀어." 

A는 옆에서 장난기 어린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누군 뭐 회사 때려치우는 게 취미라서 때려치우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지. 아휴, 뭐 어때요. K씨도 충분히 고민한 후에 선택을 했을 텐데요." 

나는 웃으며 하되 괜히 단호한 투가 되었다. K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 K는 다른 취준생과 다르다. 이미 공인노무사라는 국가자격사이니까. 그럴지라도 잦은 이직은 타인이 보기에 인내심 문제라고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단순히 끈기나 인내심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도 나나 K처럼 스스로의 인내심과 끈기를 의심하거나 의심받으며 20대를 보내고 있을까? 또는 이미 그렇게 보냈을까? 어려운 시기에 관한 이야기는 꺼리고,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는 늘 빛나는 모습들로 가득하니 다른 이의 현실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슨 일을 하는가?


중소기업 이곳저곳을 오가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현재 5년 차 외국어번역행정사로 살아가고 있다. 

혼자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사업자 상태이며, 이전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재직기간을 늘려가고 있다. 퇴사를 반복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나 자신을 관찰한 끝에 외국어번역행정사라는 길을 선택했다. 개인사업자이다 보니 직장인 때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고 새로운 고민이 생기곤 하지만, 지금의 직업 생활에 제법 만족한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목격하는 재미도 있고, 스스로의 장단점을 인지함으로써 점점 성장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매일매일이 행복으로 점철되진 않는다. 이 점을 분명히 언급해 둔다)   


그러니까, 현재 생활이 불안하다거나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지 같은 일이 있더라도 배울 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상황에서는 힘겨워서 정신이 혼미하기도 하고, 지난 일이 된 시점에서 복기하는 것임에도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처가 자신감이 되기도 했다. '그딴 일도 겪었는데, 이런 것쯤이야'하고.   


개인적으로 밑도 끝도 없이 '괜찮다', '잘될 거야'라며 응원하는 글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삶에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아 '밑도 끝도 있는'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특히 나 자신에게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아 그에게도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중소기업과 창업 등을 겪은 과거에서 배운 점과 1인 사무소를 운영하는 현재에서 배우는 점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재미있는 글을 보장하진 못하지만, 나의 에피소드들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면 '그런 게 있어?' 라던지 '헐' 하는 반응이었던 걸로 보아, 완전히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직업, 외국어번역행정사는 비교적 생소한 직업인지라 "어떻게 외국어번역행정사가 되신 거예요?" 하고 묻는 분이 종종 있다. 또, 일단 행정사 자격증을 따면 좋을 거라고 믿고 행정사시험을 준비하려는 분도 보았다. (그건 과거의 나?) 단순 궁금증으로 묻는 분들께도, 시험을 준비하려는 분들께도 어느 정도 답이 되길 바라며 글을 써보려 한다. 



2023년 설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며. 

-김서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