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천재가 사랑한 사람, 우리가 잘 몰랐던 김향안 여사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은 크게 외국에서 작품을 사들여 온 라이선스 뮤지컬과 국내에서 직접 만든 창작뮤지컬로 나눌 수 있습니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영국의 웨스트엔드, 미국의 브로드웨이 등에서 성황리에 공연된 작품들을 수입해 오는 것인데요. 뮤지컬을 안 본 사람도 알만한 <지킬 앤 하이드>, <오페라의 유령>, <레베카>, <맘마미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많은 뮤지컬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일까요? 대학로 소극장들은 물론이고, 대극장에서도 창작뮤지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작뮤지컬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도 하고, 어떤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에 상상을 더하기도 하고, 가상의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도 합니다. 특히,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국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극들이 많은데요. 이건 국내를 배경으로 할 때보다 조금 더 표현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가 편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너무 외국 이름만 등장하는 극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씩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한국적인 극들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물론 '빨래', '여신님이 보고 계셔'처럼 한국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대학로의 대표 뮤지컬로 자리 잡은 공연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한국의 예술가 이야기는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천재 예술가가 등장하는 작품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오감도>, <날개> 등으로 알려진 시대가 알아주지 못한 비운의 천재 이상.
점선면으로 이뤄진 그림들, 그리고 한국 미술품 중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을 그린 한국의 대표화가 김환기.
두 사람의 작품은 몰라도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두 사람이 나오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바로 창작뮤지컬인 <라흐헤스트>인데요. 그런데 이 작품은 이상과 김환기라는 두 천재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극은 아닙니다. 대신 이들의 부인이었던, 두 예술가가 사랑한 사람, 이들에게 가려져 있던 이름, 김향안 여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라흐헤스트>라는 제목도 김향안 여사가 남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Les gens partent mais l’art reste)'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김향안 여사는 스무 살쯤 어린 나이에 이상과 결혼을 하였지만 1년 만에 이상이 죽고, 이후에 김환기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라흐헤스트> 바로 이 김향안 여사의 사랑과 사람, 예술,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김향안 여사는 수필가로도 활동을 했고, 김환기 사후에 현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을 건립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분의 삶에 대해서는 이상과 김환기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창작이 더해진 뮤지컬을 통해서나마 가려져 있던 김향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제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라흐헤스트>에는 향안, 환기, 동림, 이상 이렇게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극은 노인이 되어 죽음을 앞둔 향안과 스무 살의 책벌레 동림의 모습과 함께 이제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알려주는 노래(나라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후 극은 크게 세 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하나는 향안과 환기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동림과 이상의 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앞에 두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하는 향안과 동림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게도 향안과 환기의 이야기는 시간의 역순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동림과 이상의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전개됩니다.
향안의 시간은 환기가 죽고 난 뒤 개인전시회를 여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죽은 환기가 나타나 진작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하지 않았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하죠. 그리고 시간은 조금씩 과거로 흘러 환기가 죽기 전에 함께 했던 시간들, 그리고 환기를 만나기 전의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동림의 시간은 낙랑파라에서 책을 읽다가 이상을 처음 만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상과의 만남, 결혼, 그리고 이상의 죽음까지 사실상 역사가 스포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극에서 동림과 향안은 굉장히 단단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단지 이상과 환기의 뮤즈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극 중간쯤 네 사람이 함께 부르는 '너로 인하여'라는 넘버를 보면 환기와 이상이 향안과 동림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되고, 더 큰 꿈을 꾸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요. 자신의 삶과 예술을 완성시켜 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는 건 예술가가 아닌 제 생각에도 너무나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멋진 두 사람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약간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검색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쩌면 스포가 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알고 보면 극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향안 여사를 검색해 보면 본명이 변동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향안 여사는 김환기와 결혼을 할 때, 자신의 이름까지 다 버리고 삶을 새롭게 시작을 합니다.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극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 극을 미래의 향안과 과거의 동림이 만나서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치유의 극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덕분에 극에서 향안과 동림이 만나는 장면들은 단연코 모든 장면들이 다 좋습니다. 괜히 눈물도 나고, 왠지 위로도 되고, 마치 제가 위안받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심을 담자면 <라흐헤스트>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극이기도 한데요. 저는 동림이 주는 단단함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보고 나면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힘이 나는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의 삶이 극보다 더 극적일 때, 그 이야기가 극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김향안 여사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고 했었나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술이 남아 또 다른 예술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을 남긴다는 것을 이 극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작년에 초연을 했고, 지금 재연이 진행 중입니다. 초연과 다르게 무대도 더 커지고, 공연시간도 더 늘어났더라고요. 재연은 9월 3일까지 대학로에 있는 드림아트센터에서 진행되니까 향안과 동림의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은 꼭 한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