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연극, 공연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이해가 담겨있는 글이 아닌 그저 취미생활의 기록입니다.
<빨래>를 빼고 대학로 뮤지컬을 말할 수 없다
대학로에는 정말 많은 소극장이 있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고 여러 관이 있는 극장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개의 공연장만 있는 소극장들인데요. 합치면 그 수가 아마 100개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공연 중인 작품도 엄청나게 많은데요. 보통의 공연들은 두세 달 정도 기간을 정해놓고 하지만, 기간을 정해놓지 않고 매일매일 공연을 하는 오픈런 중인 공연들이 있습니다. 언제든 대학로를 찾으면 볼 수 있는 든든한 대학로의 지킴이들이죠.
이날이 무려 5,552번째 공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극은 뮤지컬 <빨래>일 텐데요. <빨래>는 2005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20년 가까이 공연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연을 진행한 만큼 거쳐간 배우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요즘은 TV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정문성, 이규형, 곽선영 배우도 출연을 했었고, 한국 뮤지컬의 간판 홍광호 배우도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대학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많은 배우들이 거쳐간 걸 보면 우리나라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등용문 같은 공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빨래>처럼 하나의 공연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공연도 많은 냉정한 공연 시장에서 20년 가까운 시간 자리를 지킨다는 건 경이로운 일입니다. 저는 2010년쯤 처음 공연을 봤었는데 10년이 지나도 그때 나왔던 배우가 여전히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는데요.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 오래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빨래>는 '서울살이 몇 핸가요?'라는 넘버로 시작하는데요. 이 노래에 이 극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서울에 와서 시간이 흘러 지금은 왜 여기 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안에는 또 각자의 사연들이 가득 차 있죠.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 나영은 꿈을 찾아 강원도를 떠나 홀로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을 하며 돈을 모아서 야간대학도 다니겠다는 꿈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또 다른 주인공 솔롱고는 멀리 몽골에서 꿈을 위해 서울로 왔지만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신세입니다. 꿈을 갖고 찾아온 서울이 이들에게는 너무 냉혹하기만 합니다. 1막 마지막에 나오는 넘버 '비 오는 날이면'에는 이들이 느끼는 서울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커튼콜 모습
그렇지만 눈물 나고 억울한 서울살이에도 서로를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랑도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솔롱고는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가 마주친 나영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 마음을 담은 넘버, '참 예뻐요'는 <빨래>를 대표하는 넘버이기도 합니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다양한 버전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빨래는 이처럼 서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꿈, 사랑, 인생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내 이야기,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극의 디테일은 조금씩 바뀌지만 그 배경이 되는 서울의 삶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지금도 참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인데요. 그래서인지 <빨래>를 처음 봤을 때는 나영의 이야기가 마치 제 이야기처럼 들려서 울컥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가사가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나요'였습니다. 서울에 올 때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은 꿈을 갖고 오겠죠. 그런데 살다 보니 사는 게 벅차서 어느 순간 그게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뮤지컬 <빨래>는 언제 다시 봐도 옛날 생각이 나고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극이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서 배경이나 시대상이 지금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명작은 시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최근에 볼 때는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도 재밌게 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극은 한동안 더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뮤지컬 <빨래>는 지금도 절찬 상영(?) 중입니다. 서울살이 지칠 때쯤 대학로를 찾아와서 <빨래>를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