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9일의 기억.2
최악의 홈스테이에서 벗어나, 호스텔로 탈출하려던 나는 경악했다. 어제만 해도 그 많던 호스텔 도미토리들이 하루만에 싹 사라져 있었다. 남은 방들은 하루에 평일인데 60유로가 넘는 방들뿐. 아. 맞다. 이스터. 빌어먹을 이스터. 성당도 안 가면서 테스코에서 이때 아니면 언제 먹겠냐며 부활절 초콜렛만 사서 처먹었더니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이 집에서 나가기는 글렀구나.
하지만 앞으로 9박을 더 해야 하는 홈스테이에서, 수상한 외국인 취급이나 당하면서 눈치 보며 억지로 밖으로 나가 서성대다 저녁시간에 맞춰 들어오기도 싫었다. 나는 쫓겨나서 산더미 같은 짐을 들고 호스텔을 찾아 더블린, 안 되면 다른 도시를 헤메는 한이 있더라도 내 할 말은 하기로 했고, 때마침 노크소리가 들렸다.
[윤송! 몸 좀 괜찮아? 저녁 먹어! 밑에 차려놨어!] 패트릭이었다. [응. 지금 내려갈게.] 주방으로 내려가자, 디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정체불명의 고기 튀김 - 햄버거 튀김처럼 보이는- 과 완두콩, 으깬 감자였다.
[오늘은 좀 어때? 감기 좀 나아졌어?] [응. 디, 조금 괜찮아졌어. 그런데 있지, 혹시 내가 낮에 집에 있는 게 불편하면 나한테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어.] [오, 패트릭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아니야. 패트릭이 니가 괜찮다고는 하는데 정말 괜찮은 건지 알고 싶다고, 계속 기침소리가 들려서 그런 거야.] 마침 패트릭이 내려왔다. [차 한잔 할래?] [응, 부탁할게.][우유는?][그냥 블랙으로 줘. 고마워.] 그리고 패트릭과 디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너희 홈스테이를 이렇게 길게 예약한 건, 더블린에서 집구하기 힘들다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서야. 그런데 4일만에 집을 구해버리니, 딱히 여행을 계획한 것도 없고, 감기기운도 있어서 뭘 할지 알아보는 겸 방안에 있었던 거야. 처음 한 달은 사실 집 구하는데 다 써야 할 줄 알았거든.] [그래, 이해해. 우리도 니가 집을 그렇게 빨리 구해서 놀랐어.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냥, 니가 계속 방안에 있으니깐, 많이 아픈 건가 걱정도 되고, 질 나쁜 애들이 해코지라도 해서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는 건 아닌가 걱정 되서 그런 거야. 나는 아이리쉬인게 정말 자랑스럽거든. 그래서 니가 아일랜드를 좋아해주면 좋겠어.]
티셔츠부터 아일랜드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은 패트릭은, 적어도 아이리쉬인게 자랑스럽다는 건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 따질 건 따져야 했다.
[아, 알겠어. 그런 거라면 고마워. 그런데 니가 내가 방문 막고 있다면서, 여기는 내 집이라고 하는 건 기분이 상했어. 나는 내가 이방에 돈을 지불했어도, 너네 손님으로 최대한 너네한테 실례가 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어. 그런데 너는 내가 마치 방안에 뭐라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더라. 집안에 낯선 외국인이 있으면 불안한 건 이해해. 하지만 그게 신경이 쓰인다면 애초에 홈스테이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거 아니야?]
사실 정말 기분이 많이 상한 부분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하지 않으려던 말까지 나와버렸다.
[방문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건 미안해, 간혹 밖에서 하룻밤 상대를 데려오는 애들도 있어서, 사실 많이 민감한 부분이야. 우리 집엔 어린애도 있으니까. 니가 방에 있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우리는 괜찮아. 그냥 니가 정말 걱정되서 그런 거야.]
[그렇구나. 서로 오해가 있었네. 그러면 부탁하나 할께.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당연하지! 물어봐! 니가 물어봐 주길 기다렸어! 가끔씩 자존심이 세서 가르쳐줘도 싫어하는 애들이 있거든!] [응.(사실 내가 그래.) 나 PPS 넘버 받아야 하는데, 이거 내가 새로 이사 가는 집 대표격 애 이름 있는 청구서랑, 개가 쓴 내가 거기 이사 간다는 편지 있어야 하는 거 맞지?] [응, 맞아. 너 근데 디파짓 줄 때 영수증 받았어?] [아니. 혹시나 해서 통화랑 디파짓 줄 때 음성은 녹음했어.] [너 그걸로 안돼. 더블린에 집 렌트 관련 사기가 얼마나 많은데. 더군다나 멕시코 애들이라니. 돈 받아놓고 멕시코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넘버 받을 때 필요하다고, 꼭 달라고 해. 혹시 돈 떼먹지는 않겠지만, 만약을 위해 꼭 받아둬. 지금 바로 메시지라도 보내놔! 개 전화번호는 확실하게 있는 거 맞지?] [응, 번호 있어. 알았어. 고마워. 나 다음주에는 안 그래도 여행 가려고 했거든. 호쓰 어때? 여기서 가까워?] [아! 호트? 좋아! 완전 좋아. 근데 날씨 잘 보고 가야 할 꺼야. 해변이라 날씨 나쁜 날에는 정말 별로거든. 근데 다음주말 뱅크 홀리데이라, 가기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건데. 잘 알아봐.] [더블린 센터에는 없어?] [음… 왁스 뮤지엄 있거든? 거긴 절대 가지마. 돈 엄청 아까워.] [그거 어느 나라나 다 있잖아.] [그러니깐. 근데 거기선 자기네가 되게 있어 보이는 척 하거든. 거기 말고, 레프리컨 박물관 가봐. 완전 좋아. 레프리컨 알어?] [그, 초록 난쟁이 요정 아니야?] [맞아. 오코넬 스트리트에서 바로 갈 수 있어. 그리고 웬만하면 학원 1주 과정이라도 등록해서, 학생카드 만들어. 그러면 시티센터에서도 옷 살 때나 차 탈 때 할인 혜택도 많고, 되게 괜찮아.] [오. 그래야겠네.] [원한다면 나중에 학원 하나 가르쳐줄게, 여기 수업도 안 가도 돼 심지어. 싸기도 하고.] [오. 고마워.] [음식은 입에 맞아? 실례가 안 된다면 한국에서는 혹시 탄수화물이 뭐야?] [응? 뭐라고? 탄수화물이라고? 영양소 말할 때 그 탄수화물? 주식 말하는 거야? 우리는 쌀 먹어. 쌀. 근데 딱히 실례는 아니야.] [아, 가끔씩 아이리쉬 중에 속 좁은 애들은 우리 주식이 감자냐고 하면 발끈하거든. 근데 나는 괜찮아. 우리는 감자 엄청 좋아하거든!] [그렇구나. 걱정할 필요 없어. 한국음식은 20년 넘게 먹어와서 딱히 미치도록 그립지도 않고, 사실 여기서 저녁 먹는 게 밖에서 먹는 것보다 어느 정도 싸기도 하고. 근데 패트릭 니가 요리 잘한다는 리뷰가 있었는데 니 요리를 못 먹어봐서 아쉬워.] [그지? 내가 요즘 되게 바빴어. 미안해. 내가 너 떠나기 전에 되도록 요리 많이 해 줄께.! 니가 며칠간 먹었을 냉동식품 나부랭이 말고!] [뭐라고? 당신 말 다했어?] [윤송이 그러잖아!] [잠깐.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리뷰에 그렇게 써 있었다고. 너네 이전 게스트들이 그렇게 쓴 거야.] [들었지? 난 인터넷에서 공인됐어. 내가 당신보다 요리 더 잘한다고!] [그러면 집에 들어와서 기타만 치지 말고 당신이 요리하던가!] [잘 먹었어. 나는 비챔스 타먹고 올라가서 자야겠다.] [아! 너 오늘 빨래 돌려야 한다고 했잖아! 나 내일 일하니깐 지금 빨래 맡기고 가!] [아 맞다. 10유로 맞지?] [아니야. 너 도착했을 때 거스름돈 못 준거 4유로, 저녁식사 돈 받은 것 중에 거스름돈 2유로, 그리고 어제 저녁 못해준 거 4유로! 10유로 받았어!] [응, 알았어. 부탁할께.]
나는 그 말들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내 웃음도 온전한 웃음이 아니었다.
내가 더 어린 대학생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순진했다면, 그들이 정말 친절한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말을 모두 다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나는 단순한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들의 친절은 내가 첫날 친절한 커플에게 받은 환대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닌, 내 돈 350유로로 산 것이었다. 그들의 사과와 여행정보는 좋은 리뷰를 위한 변명이자, 숙박객을 잃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나 역시, 나에게 다른 숙박업소에 대한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걸 원치 않았기에 마치 순진한 대학생마냥 말 몇 마디에 기분이 풀린 것처럼 연기를 했고, 그들은 안심했다. 내 앞에서 어설픈 부부싸움 꽁트를 할 정도로 안심했다. 그리고 나는 원하던 사과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어설픈 꽁트에 웃어주었다. 그러면 대충 이들과의 문제는 잘 해결된 것이리라. 철저하게 돈으로 얽힌 관계에서, 그 이상을 바라고 싶지 않았다.
저녁식사로 나온 햄버거 튀김만큼 밍밍하고 느끼하며, 인위적인 맛없는 대화가 끝나고, 방으로 올라온 나는 머뭇거리다 홈스테이 에이전시에 쓴 메일을 임시보관함에서 지워 버렸다.
여기가 호텔이나, 호스텔이었다면, 당연히 나는 불만을 표했을 꺼다. 한국에서 컴플레인을 재기할 때 내가 그랬듯, 최대한 객관적인 척, 화나지 않은 척 하며 시니컬하게 소소한 불만사항 하나하나 지적하며 리셉션에 따지고, 인터넷에 시니컬한 리뷰를 달았을 것이다. 소심병 말기 환자답게 증거 사진까지 몇 장 첨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은 전문적인 숙박업소가 아니었다.
나는 남들은 20대 초반에 한다는 고생을, 서른 즈음에 사서 하기 위해 온 거였는데. 주변에서 다 멍청한 짓이라고 말리고 욕해도 스스로 고집 부려 산 그 비싼 고생길 패키지의 시작점에서, 힘들다며 징징대고 있었다. 편안함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홈스테이를 예약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영어를 배우러 온, 홈스테이 가족들이 하루에 말 몇 번 붙여줘야 학원 밖에서 더듬더듬 몇마디 겨우 떼는 수줍음 많은 대학생도 아니고, 누군가의 진심어린 보살핌이나, 가이드가 필요해서 홈스테이로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애초에 조금 불편해도 싱글룸이 싸다는 이유로, 아일랜드 가정집에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홈스테이로 숙소를 정했고, 약속대로 혼자 아일랜드 가정집의 방을 썼으니, 그러면 된 거다.
내가 나쁜 리뷰를 남기고 에이전시에 항의를 한다면, 나는 이 집의 부업에 적든, 크든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심하다면 에이전시의 재심사 때문에 이 집은 홈스테이 호스트 자격을 잃게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언제나 예의 바르고 친절했던, 이 집의 4남매들은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내가 비록 이 방에 숙박료를 지불하긴 했지만, 머무는 동안의 사소한 불편과 서로간의 오해로 이 가정에 그런 피해를 입힐 자격은 나에게 없다.
이곳이 아닌 여행객으로 가득 찬 시내의 호스텔에 묵었다면, 이런 불편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침마다 지나가는 이웃들의 지대한 관심과 친절한 [Hiya!]라는 아침인사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심 좋은 교외가 아니었다면 지나가는 할머니들의 짐을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들어드리고, 세상에서 가장 듣기좋은, [Thank you, Love]라는, 할머니들의 아이리쉬 악센트 가득한 감사인사도 듣지 못했을 거다. 보통의 아이리쉬들이 저녁에 뭘 먹고 사는지도 잘 몰랐을 거고, 보통의 아일랜드 집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었을 꺼다.
무엇보다도, 에이전시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 동네의 쇼핑몰에 가지 않았다면 도착 후의 그 마법같은 경험들도 하지 못했겠지. 그러니깐, 어찌 보면 그런 많은 장점들에 비하면, 이런 사소한 불편은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디의 조언대로 알렉스에게 왓츠앱으로 PPS 넘버 때문에 디파짓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문자를 보낸 후, 수압이 약한 전기 온수기의 버튼을 누르고, 샤워를 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린 게 맞나 보다. 나는 홈스테이에 머무른 후 가장 쾌적한 샤워를 하고, 테스코에서 산 섬유탈취제 때문에 옥수수 쉰내가 나는 베개에 향수를 두어 번 뿌린 후 베개에 코를 폭 파묻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