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4의 기억 - Howth.
집 문제도 해결했겠다, 약속도 없겠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패트릭과 디에게 말한 대로, 호쓰(Howth)에 놀러 가 보기로 했다. 비가 올 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버스를 잡아 타고 시티 센터로 나가, 처음으로 더블린 시민들의 대중교통 중 하나인, 다트(Dart) 승강장에 도착했다.
승차권을 따로 끊을 필요가 없이, 립카드로 해결이 되었다. 다트를 이용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반대 방향으로 올라갔다가 나중에야 노선도를 보고 알아차리고 반대 플랫폼으로 옮겨갔다.
올바른 플랫폼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초록색으로 칠해진, 정겹게 생긴 네모난 기차가 도착했다.
초록빛을 내며 반짝이는 버튼을 누르고, 기차에 올라 탔다. 두 정거장 쯤 지났을까.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 집, 바다, 집, 집, 바다. 언덕, 바다, 집, 언덕, 바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호쓰에 도착했다.
역 밖으로 나와 바라본 호쓰의 역은, 예뻤다. 어릴적 쓰던 크레파스의 카나리아 색과 남색이 칠해진,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역이었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코를 콕콕 찔러왔다.
부둣가로 가는 길에는, 해산물 판매장 겸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한 레스토랑에 들러 피쉬 앤 칩스와 스프라이트 캔 하나를 테이크아웃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포장박스와 차가운 스프라이트 캔을 들고, 부둣가를 걷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앉아있는 곳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머리를 드레드로 땋은 남자 버스커가 기타를 들고 손을 호호 불며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목도, 가사도 잘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듣던 중, 갑자기 주변의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물개 한 마리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람들이 던져줄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먹이를 주지 않았다. 나 역시 바다에 기름기 가득한 피쉬앤 칩스를 던져넣기 싫었기에, 물개가 실망한 듯 물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을 때까지 그저 물개를 쳐다보며 내 피쉬 앤 칩스를 마저 먹고, 소화를 시킬 겸 부둣가를 걸었다.
부둣가를 걷다 보니, 바닥이 뭔가 이상했다. 뭔가 자세히 들여다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다 똑같은가 보다. 돌이나, 시멘트마다 수많은 이름과 이니셜, 날짜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득 며칠 전 예이츠 전시관에서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쪽지가 생각났다. 우리는 모두, 흔적을 남기려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사정을 가지고, 기쁨과 슬픔을 품고 흔적을 남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흔적이 더 크게, 오래 남기를 바란다. 문득, 서글프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껏 흔적을 남겼던가. 그 흔적의 크기와 깊이는 어떨까. 남들이 보기에 좋은 흔적일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흔적일까. 이곳으로 오지 않고 머물렀다면, 나는, 행복했을. 나는 이곳에서 일 년동안,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기게 될까.
트래킹 코스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별로 걷고 싶지 않았다. 그저 두 시간 더, 조용히, 눈이 아리게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소금기 머금은 바람을 옷에 담아 더블린으로 가는 다트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