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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29. 2022

이 집에선 또 얼마나 살게 될까.

이사는 새로운 집에서 지킬 규칙들을 정하는 일이다. 규칙들 중 일부는 옛집에서 가져온 것들도 있지만 새로운 집의 구조에 따라, 동선에 맞춰 새롭게 규칙들을 세운다.


신혼집에 들어갈 땐 짐이 전혀 없었으니 이사랄 것도 없었다. 살면서 이사는 많이 다녔다. 하지만 그동안은 학교나 학원을 갔다가 새로운 주소로 하교하면 이사가 되어있었으니 이사를 처음 겪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고작 빈손으로 신혼집에 들어온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짐이 엄청나게 늘었다.


새로운 집에 들어와서는 어느 부분이 옛집과 같고 다른 지를 먼저 체크한다. 이 집은 내 버릇을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눈치를 본다. 짐을 정리하며 몇 가지 규칙이 더 생긴다. 화장실에 보관함이 없어 창고에서 수건을 꺼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카드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있어 이제 굳이 얼리거나 모아두지 않아도 된다.


복덕방 아저씨와 함께 왔던 이 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아마 우리가 마지막 세입자일 거라 하셨다. 막상 들어와 보니 집은 예상보다 훨씬 낡아 있었다. 곳곳에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있었다. 40여 년의 시간 동안 이 집엔 몇 명의 사람들이 살다 나갔을까. 이 집은 그들을 모두 기억할까. 이제는 많이 벗겨져 가는 문틀의 페인트는 몇 번째 세입자였을까. 시멘트 천장을 뚫고 커튼레일을 단 사람은 커튼을 몇 번 바꿨을까. 제일 처음 이 집을 분양받아 산 사람은 이 집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인테리어 공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했을 적에 살던 사람은 얼마나 기뻤을까. 40여 년의 시간 동안 묻은 이 흔적들은 또 분명 누군가의 규칙의 흔적들이었을 테다.


이사한 지 이틀이 지났다. 아직 단지도 한번 둘러보지 않고 짐을 정리하는데만 꼬박 이틀을 썼다. 전에 살던 할머니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텅 비었던 집은 어느덧 우리의 공간으로 꾸며졌다. 구석에 세워둔 스탠드를 켜니 온 집이 따뜻한 색으로 물든다. 규칙이 하나 더 생긴다. 밤엔 스탠드만 켜도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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