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터레이 물범, 보슬비, 그리고 반성
‘쉿! 조금만 소리를 낮추자.’
테이블을 비추는 작은 핀라이트에 의지해 칭얼대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연거푸 말했다.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수차례에 갖다대도 아이는 아직 이 제스처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거니와 아이에게 그런 동작을 취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우리의 대화 소리보다 크긴했지만 아이가 언제 울음을 터트릴 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여행지에 온김에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기로 했다. 여행 이틀 째가 되니 담담해진 것인지 식당을 정하는 데 아이는 전혀 고려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몬터레이에서 평점이 좋고 분위기도 있는 곳으로 예약을 했다. 하이체어에 아이를 앉히고 첫 번째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괜찮았다. 버터향이 가득한 새우리조또를 잘 받아먹더니 메인 요리가 나올 무렵 의자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스테이크를 포장해서 숙소로 가야할지 결정의 기로에 선 순간이었다.
아이는 물컵에 담긴 얼음에 관심을 보였고 아이가 얼음을 만지고 노는 동안 우리는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두살 아이를 데리고 여유있는 식사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다독이고 한 손으로는 음식을 먹는 멀티플레이를 해야했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심지어 대화를 나누긴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식당에서 나와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도 아이는 유모차에 타기를 거부했고 제멋대로 가고 싶어했다. 찻길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아이를 세워놓고 한참동안 주의를 줬다.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을 뒤틀던 아이는 이윽고 가만히 서서 고개를 끄덕였고 손을 잡고 숙소로 향했다. 한참동안 조용히 서서 유모차를 지키고 있던 남편은 우리가 길을 걷자 같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 길을 재촉하거나 짜증을 내면 모두의 밤이 엉망이 될 것이란 걸. 다행히 우리는 인내만이 최선이라는 데 암묵적 동의를 한 듯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가장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람은 아이였으니까.
두번 째 여행지인 몬터레이에서의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파밸리를 떠나 다음 목적지를 몬터레이로 정한 것은 아이에게 해양생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몬터레이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국립해양공원이다. 해변가로 가면 수백마리의 물범들이 떼를 지어 누워있는 광경을 볼 수 있고, 큰 규모의 수족관에서 다양한 해양생물을 관람할 수 있다.
의도와 달리 아이는 눈 앞에 게으르게 누워있는 물범 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두돌도 안된 아이에게 물범이란 존재는 귀엽지도 험상궂지도 않은 느리게 움직이는 이름 모를 동물에 불과했다. 오히려 동네 산책길에 종종 보이는 토끼 한 마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토!끼!’라고 소리치며 환호하는 아이이니, 해양동물 관람은 시기상조인듯했다.
숙소에 들어와 아이를 재우고 남편에게 다음날 일정에 아쿠아리움은 빼야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나는 아쿠아리움을 좋아해 여행 중 기회가 될 때마다 관람을 하러간다. 몬터레이 아쿠아리움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라 주차하는 데만 1시간은 족히 넘는다는 후기를 보고나서 내 욕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아이가 해양생물에 관심을 보이는 나이가 되면 다시 오기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중 이번 여행을 위해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는 답답한 카시트에 장시간 앉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채 끌려다니고 있고, 남편은 아직 면허가 없는 나를 대신해 혼자서 장거리 운전이 주는 피로를 감수하고 있겠구나. 여행을 계획할 때는 설레는 마음이 앞서 보이지 않았던 가족들의 입장이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정말 나만 좋자고 떠난 여행이구나.
시간이 흐를 수록 아이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또 계속된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큰 불평없이 여정에 임해준 남편과 예상보다 잘 견뎌준 아이가 고마웠다.
그동안 아이 키우느라 고생한 내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이 정도는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아이에게는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변화에 적응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고 가족여행의 당위를 찾으려 했다. 남편에게는 가끔 바람을 쐬며 기분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희생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할 수 없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을테니. 가족여행은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구성원들에게 지나친 부담이 된다면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정을 짜는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여러 생각에 잠겨 의기소침해지려는 찰나, 숙소 창 밖에서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만에 들어보는 반가운 빗소리인가.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물기를 가득 머금은 잿빛 하늘, 흩날리는 빗방울이 우리의 두번 째 밤을 맞아주고 있었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남편도 어느새 편안한 얼굴로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쉽지 않은 여행이지만 우리만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으니 그것으로 됐다. 아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얘기를 들려주면 되겠지. 몬터레이 시내 한복판에서 얼마나 떼를 쓰고 울어대었는지 지나고 보면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들.
그래서 나는 가족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남은 여정을 더 즐겁게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