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전쟁의 결말은
어느 날 아침 나는 결국 폭발해 버렸다. 특별한 징후 같은 건 없었다. 그날 아침부터 시작된 분노가 빠르게 한 겹 씩 쌓여갔고 한 시간쯤 경과했을 때 손 쓸 겨를 없이 터져버렸다.
살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뵈는 게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본 적이 언제였을까. 노란 초딩 체육복을 입고 동생을 쥐어박으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 던 약 20여 년 전이 떠오른다. 내 목소리가 걸걸해진건 다 내 동생 때문이라며 헛소리를 하고 다녔던 부끄러운 청소년 시절도 같이.
그날 아침도 긴 주말의 피로로 힘겨워하는 아이를 겨우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등원 시간까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는데 아이는 이불속으로 몸을 말아 넣고는 다시 잠잠해졌다. 등원 전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전력을 잃은 기분, 그런데 엄마인 나도 주말의 피로를 씻기 위해선 필사적으로 아이를 보내야 하기에 없는 힘을 끌어모아 아이를 달래도 보고 윽박질러보기도 했다.
아이도 마찬가지로 필사적으로 등원을 거부했다. 울어보기도 하고 이성을 되찾은 뒤 너무 졸리고 힘드니 못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난리 치지 않고 차분히 원하는 걸 말한다고 해서 다 들어줄 수는 없다. 그 태도는 바람직하지만 유치원에는 못 가겠다는 그 바람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밀고당기기를 했다. 침실에서 복도까지, 복도에서 거실까지, 다시 침실에서 거실까지, 그리고 거실에서 드디어 현관문까지. 그 사이 아이는 아침을 먹고 가겠다고 떼를 썼고, 머리를 묶지 않겠다고 떼를 썼고,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눈물을 닦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현관문까지 아이를 끌고 오다시피 데리고 왔을 땐 이미 등원 시간에서 10분이 지나있었다. 이미 늦었는데도 내 마음은 계속 조급했다. 둘째를 카시트에 태우고 이제 첫째가 신발 신는 것만 도와주고 차에 태우면 끝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이는 울부짖으며 물통에 얼음을 넣어달라며 평소에 하지도 않던 요구를 했다. 얼음이 없으니 내일 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동생과 먼저 나갈 테니 집에 혼자 있으라든지 어떤 강수를 둬도 통하지 않자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렀고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다.
온몸에 남아있던 힘을 끌어모아 아이에게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한 번의 샤우팅은 꽤 강렬해서 온몸이 달아오르고 분노가 손끝 발끝으로 갓 캔을 딴 탄산음료의 탄산처럼 톡 쏘며 방출되고 있었다.
아이는 내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징징대며 얼음을 찾아댔다. 그렇게 두세 번 더 샤우팅을 하고 나서야 아이를 차에 태워 유치원까지 데려다줬다. 출근도 안 했는데 벌써 퇴근을 앞두고 있는 것 같은 직장인의 기분이 이런 걸까. 아이를 내려다 주고 다시 운전석에 앉으니 저녁 6시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등원시간을 훌쩍 넘긴 9시 50분이었다.
곧 후회도 밀려왔다. 갓 돌 지난 둘째를 달래듯 첫째 아이를 좀 안아주고 달래주었다면 어땠을까. 감수성이 예민한 첫째인데 좀 더 다정하게 얘기했으면 어땠을까. 떼쓰는 와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던 첫째의 등을 좀 더 부드럽게 잡고 데려갔으면 어땠을까.
육아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첫째에게 이런 식으로 쏟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째는 아직 너무 작고 어리지만 첫째는 말도 제법 잘하기도 하고 맏이이기 때문에 잘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늘 있었던 것 같다. 첫째도 이제 겨우 세돌을 넘긴 어린아이인데 말이다. 어떤 스트레스든 그건 어른의 몫이다. 그걸 관리하지 못한다면 피곤해서 아침에 우는 아이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아이와 똑같이 소리 지르고 싸우려 들다니. 얼마나 자라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이를 존중하면서도 권위 있는 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울어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단호하게 얘기하려면 어떤 수련이 필요한 걸까. 뾰족한 수는 없는 걸까. 요령 같은 것도 없는 걸까. 시간이 답인 걸까. 아이가 다 자라기 전에 엄마는 얼른 어른이 되어야 할 텐데. 신이시여 지혜를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