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어렵게 출발.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홋카이도행 티켓을 끊었다. 군 시절 읽었던 <설국> 속 눈 덮인 마을과 홋카이도 해산물 요리, 이 둘보다 매력적인 여행 요소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주위엔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일본 여행을 꺼리는 이가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사회적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았다. 그렇다고 눈치볼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인들에겐 "난 이완용안이야"라고 쿨한 척까지 해 버렸다. 반 년 간의 인턴 생활 후 주어진 휴식 1주일. 오랜만에 얻은 휴일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기대와, 정규직 전환이 안 된다면 더 길게 쉴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안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무언의 사회적 압박이 있던 여행 준비단계만큼이나 출국날도 편치는 않았다. 감기에 덜컥 걸려버렸는데 완전히 회복히 안됐기 때문. 여행을 떠나는 이유의 절반이 미식(美食)이었는데 감기에 걸려 음식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니. 야속한 콧물은 내 콧속뿐 아니라 가슴까지 꽉 막히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다. 네덜란드로 교환학생을 떠났던 2016년 이후 3년 만에 출국 비행기를 타니, 몸 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일렁이는 듯 했다. 신기했던 점은 인천공항에서 홋카이도로 떠나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한국인보다 중국인이 많아보였다는 사실. 시국의 영향인지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의 굴기가 강력했기 때문인지.
약간의 몸살기는 나를 나른하게 했다. 충분히 자고 나왔다고 생각했건만 비행기에 앉았다 눈을 떠보니 신치토세 공항이었다. 이국적인 느낌은 없었다. 낯설지도 않았다. 일본 땅을 밟아보는 건 처음이고 할 수 있는 일본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일본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파리에서처럼 말을 걸면 문제 없지 않을까하는 나태한 낙관만 있었다. 일본에서는 '빠동' 대신 '스미마셍'으로 바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영어로 물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역으로 가는 JR기차 밖 풍경은 한국보다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을 닮았다. 반 년 이상을 네덜란드에서 살아서 그런지 정겨운 감정도 들었다. 한 시간 쯤 걸렸을까. 삿포로 역에 도착하니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3시였다. 아침에 집에서 바나나를 먹고 공항에서 샌드위치,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을 먹었다지만 오후 3시는 충분히 배고플 시간이었다. 삿포로역에 도착하자마자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미리 찾아 놓은 수프 카레 가게로 이동했다.
같이 인턴을 했던 동생이 삿포로에 가면 꼭 먹어 보라고 권했던 요리였다. 식당은 동생이 추천한 곳과 다른 곳을 갔지만 어쨌든 삿포로에서의 첫끼는 수프 카레. 기름진 국물향이 막힌 콧속을 뚫고 올라왔다. 거부감 없이 계속 국물을 들이켰다. 야채의 익힘도 적당했다. 특히 감자의 포슬포슬함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최고는 닭다리 튀김이었다. 얇은 튀김이 어찌나 바삭하던지 미간을 찌푸려가며 튀김 껍질을 음미했다. 그 외에도 가지, 피망에 국물과 밥을 곁들어 한 숟갈 두 숟갈 목구멍으로 밀어넣다 보니 어느덧 그릇이 텅 비었다.
든든해진 몸을 이끌고는 숙소로 향했다. 유니조 인 삿포로에서 묵었는데 1인실이 생각보다 깔끔해서 만족했다. 문제는 뜨끈한 스프카레도 감기 기운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는 점. 일단 숙소에서 쉬었다 이동하기로 결정. 욕조가 있길래 뜨거운 물을 받아 반신욕을 했다. 정수리에서부터 땀인지 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몸을 다 씻고는 침대를 뒹굴거리며 저녁 먹을 장소를 찾았다. 첫날 저녁 장소는 북해도식 양고기 구이를 파는 '다루마'.
3박 4일 간 여행을 하며 공항과 오타루를 갈 때 말고는 대중교통을 아예 이용하지 않았다. 숙소에서 스스키노 거리를 뚫고 다루마로 향했다. '눈의 도시' 삿포로라지만 날짜가 애매해서 그런지 소복히 쌓인 눈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도시는 겨울과 어울린다는 수식어를 지키려 찬바람을 힘차게 뿜어댔다.
삿포로는 잘 정돈된 도시였다. 파리나 바르셀로나처럼 도로와 건물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7시 좀 넘어 도착한 다루마 본점에는 벌써 대기 손님이 똬리를 틀었다. 40분 정도 기다리고 가게에 입성한 것 같다. 한국에서도 양고기 가게는 많이 다녔다. 이치류와 그 하위브랜드 양심, 라무진, 화양연가, 진 1926 등. 가끔은 양고기가 소고기보다 맛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기에.
다루마는 여행객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리미엄 부위라고 추천하는 살덩어리를 구워 먹었을 땐 눈이 번쩍 뜨였다. 기름기도 적당하고 부드러웠다. 또 미간이 찌푸려졌다. 감기에 걸렸다지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마비루(생맥주)를 한 잔 시켜 양고기, 대파, 양파와 흡입했다. 찬바람을 뚫고 와서 그런지 막혔던 코에서는 콧물이 새어오기도 했다. 겨우 맥 주 한잔에 얼굴도 뜨끈해졌다.
첫날부터 괜히 무리했다간 남은 3일을 망칠 것 같았다. 밥을 먹고는 바로 숙소로 이동. 그래도 뭔가 아쉬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끓여 먹었다. 시장에 들러 산 귤로는 입가심을 했다. 먹다 끝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