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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트리 Nov 14. 2024

수능을 망쳐버린 자.

수어그림 <눈-보다> / 지후트리 / 2016



수능을 망쳐버린 자.


2006년 수능을 치렀다. 


초등학생부터 중2 1학기까지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던 것 같으나 육상부 높이뛰기 선수를 한 것을 핑계를 삼아 여러 가지의 이유들로 공부와 멀어졌다. 지역 외로 고등학교를 가고자 하는 꿈은 애당초 날려먹었다. 하는 수 없이 집 앞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좋아하는 과목만 열심히 해서 점수의 편차가 컸다. 내신으로 수시를 갈 수 있는 방법과 정시로 대학 입학의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큰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그저 현재에 내가 받은 여러 가지 과목에서 1등 했을 때의 기쁨을 만끽했다랄까.


" 오~ 그래도 체육, 미술은 내가 전교에서 1등인데? "


정말 귀엽고 긍정적이고 엉뚱하고 순수한 생각이 아닌가. 전 과목을 고루고루 잘해야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거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학구열이 높은 엄마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엄마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의 아들에게 과외를 요청했다. 동료의 아들은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과외나 학원을 다닌 적도 없이 스스로 공부해 고려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성적도 항상 상위권을 유지해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이기도 했다. 처음 우리 집으로 와서 수학 과외를 해주셨다. 앉아서 근황 토크 후 문제집을 펼쳐놓고 오늘의 예상 수업 진도율에 대해 설명하고 다 풀지 못하면 그것은 스스로가 숙제로 풀어오면 되는 방식이었다. 수업방식이 매우 색달랐다. 문제집에 답안지는 과외선생님이 다 가져가고 어떠한 설명이나 강의 같은 건 없었다. 문제를 읽고 풀어나가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여러 가지 대안들을 찾아서 선생님한테 질문해 그다음의 문제를 또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그 방식이 매우 답답해서 과외비를 내는 엄마에게 미안했고 이런 것조차 잘 안 되는 내가 미웠고 목표치를 다 채우지도 못하니 속상하기도 했다. 과외시간 속에 있는 내내 괴로웠다. 좀 더 즐겁게 공부하기 위해 만나서 과외를 받는 건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문제 하나를 풀 때마다 나만의 방법을 찾기 위해 다음 과외 시간까지 치열하게 일주일을 보냈다.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과외 진도가 제법 나갔고,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봐도 찍어서 맞는 점수가 아닌 내가 직접 풀어서 받아온 점수와 마주하니 성취감이 생겼다. 이 과정의 자신감은 수학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서도 빛을 발했다. 


고3. 결전의 학년이 되었다. 학년이 오르고 처음 본 전국모의고사. 반에서 7등을 했다. 



" 너는 정시로 대학을 준비해 보는 건 어떻겠니? 이 정도 성적이면 가능성이 있어 보여 " 


정시 준비까지 6~7개월의 시간이 남았던 때였다. 


고2 겨울 방학 때 받았던 과외 한 번으로 또 한 번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 나. 자신감이 붙었던 때이기에 정시생이 되어 수능을 준비했다. 전반적인 점수대는 내가 원하는 점수대로 계속 유지가 됐었고 이대로만 간다면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결전의 수능날이 찾아왔다. 

긴장하지 말고 즐기자! 하고 고사장을 들어갔다.


언어영역 시간을 망쳐버렸다. 마치 내가 글을 하나도 읽지 못하는 문맹인이 된 것 같았다. 풀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어느 하나의 시조 앞에서 맥없이 고꾸라져버렸다. 긴장을 많이 했었고 이미 망쳐버렸단 사실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부터 수리, 영어, 사탐까지. 막힘없이 문제를 풀어나갔고. 언어영역을 제외하곤 1,2등급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문과생이었다. 언어 점수를 망쳐버려 갈 수 있는 대학이 많지는 않았다. 재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갈망하고 꼭 가고 싶은 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성적에 맞는 대학교에 진학해 자유로운 성인이 되고 싶었다. 어찌어찌 지역의 국립대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과외 선생님이 내게 물려준 문제를 대하는 능력이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때 기말시험을 마치고 방학을 즐기던 중에 하나의 우편물을 받았다. 열어보니 대학교에서 온 등록금 고지서였다. 뭔가 좀 이상했다. 33,000원만 찍혀있는 게 아닌가. 전산처리가 잘못된 건가 싶어 조교실로 곧장 전화했다. 


" 조교님 안녕하세요! 문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는데 금액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전산처리가 잘못된 걸까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 ( 키보들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어~ 너 이번에 성적 장학금 탔네. 학과 1등이야 "

" 네? 제가요? "

" 응! 보니까 그렇네 축하해! 33,000원은 학생회비 일거야 "


성인 된 이후로 처음으로 맛보는 성취감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히 맛본 것이다.


비록 수능의 언어영역을 망쳐 인서울을 하진 못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살아나갈 방법이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 이후로 제법 나의 무한 가능성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한다면 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내게 문제를 바라보는 인내심을 알려준 흥식 과외선생님에게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오늘은 수능날이다.

수험생들의 오늘의 하루가 인생의 전체가 아님을 말해주고 싶었고,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 여러분들 수고하시고 수고하셨습니다!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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