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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만충 Jan 24. 2019

죄송하지 않지만, 죄송합니다.

20원 때문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저는 죄송하지 않지만, 죄송해야 합니다.

집 근처 편의점에는 큰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가 야간에 근무하신다. 맥주를 계산하는데 나에게 죄송하다며 봉투값 20원이 있냐 묻고, 포스기에 20원을 추가로 찍었다. ‘환경부담금’ 20원. 아마 아저씨는 나 이외 손님에게도 20원을 찍기 전에 물어보고, 죄송하다 말할 테지. 부담은 안 되고, 엄한 사람이 죄송할 일만 늘었다. 환경이 소중하단 생각은 안 들고 짜증만 난다. 원래 우리 동네는 환경부담금 20원을 안 받았다. 근데 안 받으면 안 된다. 파파라치가 영수증이랑 같이 신고하면 업장은 벌금 30만 원을 물어야 한다.


근데 이 20원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진짜로. 2016년 12월 14일. 아마도 술 몇 병 가격에 딱 맞게 현금을 들고 온 손님과 편의점 알바가 환경부담금 20원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손님은 손이 두 개뿐이라 봉투가 꼭 필요했고. 아르바이트생은 벌금 30만 원이 무서워 20원을 꼭 받아야 했다. 손님은 자신이 재중동포라 20원으로 트집을 잡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실랑이 후 집에서 20원 대신 흉기를 들고 돌아왔다. 20원 때문에 엄한 사람이 죄송할 일만 생긴 게 아니라. 엄한 사람이 죽기도 했다.


“20원 안 받았어? 너 벌금 30만 원.”

정말 게으르고 심플한 환경보호 정책이다. 앱 하나를 만들더라도 유저를 예상하고 UX를 디자인하는데. 정책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어쩜 이렇게 1도 부담 안 되고 짜증만 나는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이거뿐인가. 최근 사업장 법정 의무교육으로 안전보건교육을 들었다. 우리 회사와 계약한 인강 사이트에 들어가 강의를 듣고 마지막에 시험을 쳐야 한다. 근데 양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교육영상은 플래시를 기반으로 만들었는지 퀄리티도 조악하기 짝이 없다. 작년에도 똑같은 걸 봤다. 아무래도 한번 만든 걸 계속 쓰는 거 같다. 초반 제작비만 부담하면 회사와 매년 계약하면 되니까. 남는 장사인가 보다.


한 선배가 강의는 다 듣고 취재 때문에 바빠 시험날짜를 놓쳤다. 미수자가 있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수강 기록은 초기화됐고, 선배는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듣고 시험을 쳐야 했다.

우리 사무실에는 컴퓨터와 책상뿐이고, 안전사고가 날 수 없는 환경인데. 하인리히의 법칙과 위험물 관리 수칙을 강의랍시고 보고 있자니 어떤 청년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2016년 메탄올 때문에 시력을 잃은 청년 노동자 6명. 그들은 어떤 안전교육도 못 받고, 안전장비도 제대로 못 받았다.


너무나 안전한 우리 회사를 골치 아프게 하는 법이 너무나 위험한 노동환경에 있는 그들은 하청 비정규직이라는 계급 때문인지 피해 갔나 보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 청년 6명이 메탄올로 눈이 멀기 전에 어떤 경미한 사고와 징후들을 놓쳤을까.


그들이 받았어야 할 교육은 매년 내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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