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배려하셔서 그런 거예요. 전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불안한 마음의 파도가 잠잠해졌다. 모임에서 알게 된 분과 커피를 마시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투박한 마음이 쓸데없는 질문이 되어버려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잘 맞춰주는 성격이셔서, 오늘 시간을 내주셨는지. 불편하진 않으셨는지.’ 따위의 질문이 조각나 새어 나왔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후회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말간 얼굴로 또렷하게 말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고.
빈말이든 아니든 내 성격이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언제나 상대의 마음이 궁금했다. 상대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지, 대화가 즐겁지 않은지, 노력하지 않아도 신경을 쓰게 된다. 상대의 반응을 과도하게 신경 쓴다고 자책했었다. ‘눈치 좀 그만 보고 살자’고 자신을 미워하고 야단쳤다. 어떤 성격은 좋은 성격이고 어떤 성격은 좋지 않은 성격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사람들이 좋게 봐주는 성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성격은 누구라도 좋게 봐주지 않는다고 믿어서 꼭꼭 숨겼다.
눈치를 많이 본다는 동전 뒤에는, 상대방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뒷면도 있다. 누군가는 앞면을 보거나 뒷면을 본다. 누군가는 양면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그날 밤 그녀의 말을 거쳐 ‘뒷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이르려면, 누군가의 말이나 얼굴을 거쳐야 한다. 모임에서 사람들을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같은 말과 행동이어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쌓여가면서 ‘내 모습’이 선명해졌다. 다른 사람에게서 온 모든 것들이 모두 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은 나의 초라한 모습도, 나도 몰랐던 의외의 근사한 모습도 전부 내가 아닌 것이 아니었다.
결국 ‘나다움’에 다다르는 길은 나에게서 시작해 너를 거쳐 나에게 돌아오는 길이다.
성격은 관계 안에서 분명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