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앞의 글에서 북토크라기보단 강연에 가까웠다고 - 혹은 북스피킹 같은 거였다고 말한 바 있으므로 북토크와 강연을 혼용해서 쓰겠다),
소설가가 그날따라 조금 두꺼운 셔츠를 입고 왔다고 가정해보자. 하필이면 북토크 장소는 공공기관의 별관을 대관하여 진행되었으므로 에어컨은 그리 시원하지 않다. 어제 사과를 깎다가 다쳐 손가락에 감아놓은 밴드가 습윤해서 유난히 거슬리고, 반들한 밴드 표면이 종이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을 자꾸 감각한다. 감각은 생각에 선행하므로 다음 내용을 놓쳐 잠깐 허공을 본다...와 같이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실제로 그런 적은 없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강연은 '쓰기'보다는 '하기(Performance)'에 가깝다. 수많은 시간-공간-상황적 우발변수가 작용하므로 필연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량이 텍스트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강연과 강의 등 모두 마찬가지다. 현재 나는 수업의 제공자(학원 강사)인 동시에 수용자(대학생)인데, 어느 입장이건 대면강의는 상호 간의 노력에 미치지 못하는 효율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텍스트보다는 비대면 강의를, 비대면 강의보다는 대면 강의를 선호할까.
이것도 어쩌면 물신주의(Fetishism)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기실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수업을 인수인계한 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수업내용이 뭐가 중요하겠니. 다 퍼포먼스야. 텅 빈 깡통일수록, 요란한 소리를 낼수록 좋아해. 안심되니까."
페티시즘은 결국 토속신앙의 메커니즘을 따라 '믿음'을 향해 작동한다. 불안정한 고3, 나라에서 방해될까 봐 비행기를 통제할 정도로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하며 고3을 잘 보내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며 12년 간의 노력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되며 너의 평가지표는 대학이 전부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아이들은 믿음이 필요하다. 어른의 문턱에서 발을 찧지 않는다는 약속. 그리고 믿음은 실체가 없는 것 앞에서 더욱 끌린다. 실체가 약할수록 깡통 소리는 크게 들리기 때문이다. 학부모와 학생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속고, 강사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한다. 그러니까... 강사 대부분은 그렇게 도착한 어른의 세계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며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변제하기 위해 또 누군가를 어른의 세계로 밀어넣는다. 눈이 멀 정도로 환하기만한 세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