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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와 별 May 27. 2022

문학 하는 마음, 과학 하는 마음

그간 문학의 의미를 자문하는 일은 무의미로 수렴했다.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으니까. 만약 문학이 없었다면 내 삶의 볼륨은 납작하지 않았을까. 취미라기엔 예전보다 덜 재밌고 취미가 아니라기엔 이것보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없으니.... 취미이기도 취미가 아니기도 한 것 같다. 어쨌거나 취미 이상이 되어버린 문학에 대해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작가를 거칠게 나누자면 두 부류로 나뉜다(철저하게 자의적인 기준이다). 따뜻한 작가와 서늘한 작가. 따뜻한 작가의 범주에는 최은영, 김연수, 홍지호, 정영수 등이 있고, 서늘한 작가의 범주에는 백은선, 정지돈, 금정연, 정영문, 박솔뫼 등이 있다. 왜 따뜻하고 왜 서늘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읽고 나면 내 마음이 그래서 그렇다는 설명 밖에 못하겠다(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전통적인 범주로 나누기엔 너무나 부정확하다). 따뜻한 작가의 글들은 나를 문학으로 초대했다. 구태여 말하자면 '감정교육'을 받은 것 같다. 이런 감정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사실 넌 이런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며 촘촘한 그물망으로 기분을 낚아서 보여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 사람들의 글이 없었다면 나는 좀 더 지친 상태로 시절을 견뎌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찰열처럼 달아오르던 시절을 큰 탈 없이 건너오자 사다리를 걷어찬 사람처럼 간사하게도 따뜻한 작가의 글이 재미 없어졌다. 우습게도, 슬픔을 '나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믿었다. 내심 무엇이 됐건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다만 문학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고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면 언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차피 궁극적으로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왜 중요한 것인가. 바벨탑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안 된다. 그런 언어의 불가능성을 탐문하는 일, 어쩌면 문학의 효용은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언어의 본질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시'라고 말했던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처음으로 각을 잡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 재현에 대한 윤리적 모색을 꿈꾸는 작가들은 서사의 핍진성에 기대어 설득해야 했으므로 대개 소설을 수단으로 삼았고, 파편화된 파롤 조각을 그러모아 흔들 듯 쓰는 작가들은 주로 시를 수단으로 삼는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파롤과 파롤이 빚어내는 찰나적 이미지, 필연은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흔드는 현대 물리학의 부상과 나의 관념은 맞닿아 있었다. 어줍잖게 과학적 지식을 주워 탐문하며 절대적이고 시니컬한 상대주의의 세계로 빠져들며 문학을 읽으니 문학의 역사는 단숨에 얄팍해졌다. 영상 매체가 등장한 이후, 재현으로서의 문학의 효용가치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마치 사진이 등장하고 풍경화가가 멸종해버린 것처럼, 재현으로서의 문학의 등 뒤에서 희미해져가는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웃기게도 나는 그런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문학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살고 싶어했음에도 그랬다. 기실 내가 본 것은 나의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그러하다고 답할 것 같다. 다만 한정현의 <소녀 연예인 이보나>(민음사, 2020)를 읽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오로지 리얼의 문제만을 생각하면 나아감이란 없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든다. 그것이 모던 걸들이니까요."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대상이 현전하든 재현이 불가능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아무리 고개를 갸웃하다고 하더라도 한정현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문학의 가능성을 타전한다. 아니,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전한다. 그것이 정치라 불리건 문학이라 불리건 형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구가 실린 단편의 제목이 <과학 하는 마음>인 것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있다고 믿어야 한다. 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믿지 않는다면 없어져버리니까. 그러니까 우리 부디 문학 하는 마음, 아니 과학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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