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크만 직무특성화이론으로 바라본 중증외상센터
지난주 연휴의 끝자락. 아쉬운 마음에 짝꿍과 산책을 하다 자연스럽게 치킨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원한 생맥주가 나오고 고소하고 달달한 치킨냄새가 코끝을 지배하려고 하는 찰나에 가게 윗쪽에 붙어있는 TV에서 이런 미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화면에 “MZ 직장인 80% “기성세대가 공정한 기회 안 줘” 라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큐는 구성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조직문화, 줄서기 같은 사내정치에 지친 청년 세대가 취업전선을 힘들게 통과하고도 왜 퇴사를 선택하는지, 퇴사 후 어떤 길을 가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다큐를 보다보니 며칠 전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 양재원이라는 캐릭터가 떠올랐습니다. 항문외과 펠로우로 잘 지내고 있던 양재원은 왜? 어떻게 보면 안정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항문외과가 아니라 고생길이 훤한 중증외상센터에 성격도 괴팍한 백강혁을 선택한 걸까? 어쩌면 양재원의 선택이 이 다큐가 담고 있는 질문에 대한 몇 가지 답을 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잠깐 이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헤크만과 올드햄은 1976년 직무특성화이론(Job Characteristics Theory)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당시 산업화로 인한 직무단순화의 문제, 인간관계론과 동기이론의 등장, 조직행동학의 성장, 다양한 사회적인 요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구성원의 동기와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이들이 정리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5가지 직무특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헤크만은 연구를 통해 5가지 직무특성들이 서로 어떠한 작용을 하면서 동기부여 효과를 만들어낸다 주장을 하는데요. 이를 통해 잠재적 동기지수(Motivating Potential Score: MPS)라는 공식을 정리하였습니다.
이 공식에서 중요한 것은 자율성과 피드백 두 요소를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두 가지 중 하나가 0이 된다면 다른 요소들이 아무리 높더라도 전체 MPS는 0으로 수렴하게 되겠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다섯 가지 핵심 특성을 가질 때 구성원의 동기가 높아지고, 직무 만족과 성과 향상으로 이어지게 되겠죠.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로 양재원이 백강혁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중증외상센터장인 백강혁은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외상외과 의사로 그려집니다. 사실상 응급 상황에서 모든 외과적 수술을 마스터한 히어로급 의사로 나옵니다. 마치 IT개발자중에서 유니콘으로 불리는 풀스택개발자 같은 존재이고, 투타가 자유로운 이도류 오타니 같은 존재죠. 응급 상황에서 다룰 수 있는 기술의 폭이 넓고, 빠른 판단력까지 갖춘 그를 보며 양재원은 자연스럽게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기술적으로 성장할 기회가 많다는 점은 직무 만족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이죠.
과업정체성이란 과업이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백강혁은 단순히 수술만 잘하는 의사는 아닙니다. 환자가 병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수술 후 회복까지 전체 과정을 책임집니다. 이런 모습은 직무에 대한 강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후배 의사들에게도 "이 길을 가면 나도 온전히 1인분의 의사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줍니다. 양재원이 백강혁을 따르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도, 단순한 ‘수술 기술’이 아니라 ‘의사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일 이겠죠.
과업중요성은 내가 수행하는 과업이 다른 사람의 과업이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크기를 말합니다. 중증외상센터라는 환경에서 환자의 생사는 의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외상외과는 ‘골든타임’이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한 번의 판단과 수술이 환자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백강혁은 이 점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실제로 전 세계의 수많은 생명을 구해왔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따라가면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양재원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백강혁은 병원 내의 복잡한 정치 싸움이나 관료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합니다. 물론 이런 성향 때문에 병원장, 기조실장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후배 입장에서는 ‘의사로서의 자율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양재원 역시 환자를 살리는 데 집중하고 싶었고, 그런 환경에서 자유롭게 성장하고 싶었겠죠.
백강혁은 후배들에게 엄격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피드백을 줍니다. 부족한 점을 가감 없이 짚어주고, 개선 방법까지 제시하는 스타일입니다. 처음에는 여느 의학드라마의 클리셰처럼 양재원도 기가 죽었지만, 나중에는 그 피드백 덕분에 실력이 빨리 늘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겁니다. 처음으로 ‘집도의’로써 수술을 끝낸 양재원에게 백강혁은 수술 중에 했던 판단의 근거들을 질문하며 피드백하고, 그런 끝에 양재원을 1인분의 의사로 확실히 ‘인정’하죠. 양재원은 이런 환경에서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헤크만의 직무특성화이론을 통해 양재원의 선택을 유추해보았습니다. MZ는 왜 퇴사하는가? 라는 다큐가 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이런 선배와 일하고 있는가? 이런 선배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 있는 조직환경인가? 결국 이 문제 본질인 '일'을 통해서 스스로 효용감을 느낄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양재원이 백강혁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존경심이 아니라,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본능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기술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자율성을 보장받고, 확실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곳. 결국, 진짜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백강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양재원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